28. 참됨과 거짓眞假(1)
 
  대사께서는 선천先天 2년 8월 3일에 입적하셨다. 7월 8일에 문인들을 불러 작별을 고하고, 선천 원년에 신주 국은사에 탑을 만들고 선천 2년 7월에 이르러 작별을 고하셨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중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나는 8월이 되면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은 의심이 있거든 빨리 물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의심을 깨어 미혹을 다 없애고 안락케 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를 가르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법해를 비롯한 대중들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으나, 오직 신회만이 꼼짝하지 않고 울지도 않으니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신회는 어리지만 오히려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평등함을 얻어 비난과 칭찬에 움직이지 않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구나.
  여러 해 동안 산중에서 무슨 도를 닦았는가? 너희가 지금 슬피 우는 것은 또 누구를 위한 것이냐? 내가 가는 곳을 몰라서 걱정하는 것인가? 만약 내가 가는 곳을 모른다고, 마침내 너희들과 이별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곧 나의 가는 곳을 몰라서이다.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곧 슬피 울지 않을 것이다.

  자성의 본체는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다 앉아라. 내가 너희에게 한 게송을 줄 것이니,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이다. 너희들은 다 외워서 이 게송의 뜻을 알면 나와 더불어 같다.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해서 종지를 잃지 말아라.”

  대사께서는 선천先天 2년 8월 3일에 입적하셨다.
이 선천 2년이 서기 713년인데, 육조 스님은 638년에 태어나 75세가 되는 713년에 돌아가셨지요. 오조 홍인 스님과 육조 혜능 스님의 나이 차이는 44세이고, 홍인 스님과 신수 스님의 나이 차이는 12세입니다. 오히려 신수 스님과 혜능 스님 나이 차이가 32세이고, 그리고 혜능 스님과 신회 스님 차이가 32세입니다.

  7월 8일에 문인들을 불러 작별을 고하고, 선천 원년에 신주 국은사에 탑을 만들고 선천 2년 7월에 이르러 작별을 고하셨다.
  대사께서 돌아가시기 전 해에 고향인 신주 국은사에 탑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모든 문인들을 불러 작별을 고했습니다. 신주 국은사에는 육조 스님의 부모 묘가 있습니다. 오래 주석하신 조계 남화사(보림사)는 소주에 있고 광효사는 광주에 있는데, 신주는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2~3시간 차를 타고 가는 거리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중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나는 8월이 되면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은 의심이 있거든 빨리 물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의심을 깨어 미혹을 다 없애고 안락케 하리라.
  참 이것 보면 굉장히 부러워요. 당시에는 화두 들고 공부 안 해도 그냥 문답하는 가운데에 깨닫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의심나는 걸 물어라. 내가 의심을 깨어 미혹한 것을 안락케 해주겠다. 당시는 근기가 수승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그만큼 가치를 인정했던 것 같아요.
  지금 우리 시대가 부처님 법의 가치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환경이 그 가치를 인정하는 장애요인입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인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돈의 가치를 세상에서 제일로 두고 있으니까 우리 승가도 그 가치에 같이 동조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가치보다도 돈의 가치를 더 크게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예전보다 수행하는 여건이 참 안 좋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단경》을 통해서 무엇보다 부처님 법에 대한 가치를 마음 속 깊이 느끼면, 불교를 공부하려는 의지도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내 밖에 있는 여러 조건들이 부처님 법보다 더 귀중하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래도 공부에 소홀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상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를 가르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실 십대 제자들이 있으니까 가르칠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육조 스님만 못하니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법해를 비롯한 대중들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으나, 오직 신회만이 꼼짝하지 않고 울지도 않으니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중들이 한 달 후에 대사께서 간다고 하니까 슬퍼서 울었는데 신회 스님만 안 울었어요.

  “신회는 어리지만 오히려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평등함을 얻어 비난과 칭찬에 움직이지 않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구나.
  ‘좋다-나쁘다’가 결국 양변이지요. 그것이 평등하다는 것을 어린 신회는 알아,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는 선과 악을 평등하게 안 보지요. 선을 좋은 것으로 보고 악을 나쁘게 보아 차별심으로 보는데, 신회는 평등하다고 보았지요.
  이것이 불교의 핵심인 중도연기입니다. 신회는 중도연기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을 평등하게 보아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비난받으면 화가 나지요.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지고요. 이것은 우리가 분별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 본질은 공이다,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누가 칭찬하든지 욕을 하든지 평등하게 받아들여요. 그러면 화도 안 나고 그런 분별심을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신회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육조 스님이 돌아가신다 해도 눈물도 안 흘리고 울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못했고요.

  여러 해 동안 산중에서 무슨 도를 닦았는가? 너희가 지금 슬피 우는 것은 또 누구를 위한 것이냐?
  너희들은 평등하게 보지도 못하고 헐뜯고 칭찬하는 데 대해서 ‘좋다 나쁘다’로 분별하니까, 너희들은 산중에서 뭘 공부를 했느냐? 이렇게 꾸짖는 겁니다.
스님이 돌아가신다는데 너희가 왜 우느냐? 그러면 누구를 위하느냐?

  내가 가는 곳을 몰라서 걱정하는 것인가?
육조 스님이 돌아가시면 어디로 가는지 대중들이 알면 울지 않을 텐데 모르니까 슬피 우는 것인가 이렇게 말하십니다.

  만약 내가 가는 곳을 모른다고, 마침내 너희들과 이별하지 않겠느냐?
가는 곳을 모른다면 어찌 한 달 전에 미리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말하겠느냐? 나는 내 갈 곳을 안다는 말씀이죠.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곧 나의 가는 곳을 몰라서이다.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곧 슬피 울지 않을 것이다.
  가는 곳만 알면 너희들이 슬피 울지 않을 것이다. 육조 스님은 말할 것도 없이 ‘슬프다 기쁘다’ 하는 생각도 않을 것이고, 가는 것도 일상사에 밥 먹고 고단하면 잠자듯이 평상심이 무심인 것을 알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씀입니다.

  자성의 본체는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몸뚱이를 벗고 저 세상으로 가고 있지만, 이 몸뚱이 아닌 본체 자리는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거기에 있다. 또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슬피 울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느냐 이거예요.
  앞에서 파도와 바닷물을 비교했는데, 큰 바닷물을 법성法性이라 한다면 거기에서 천 개  만 개 파도가 일어나지요. 이 파도가 천 개 만 개 생겨도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물의 크기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다 같은 물이죠. 그 파도가 일어나서 사라졌다고 할 때 그 물이 어디로 갑니까? 거기에 있지요. 그것을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인 성품 자리에서 보면, 파도가 끝없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사그라졌다’ 하듯이 생하고 멸하고, 멸하고 생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과학계에선 우리 몸뚱이를 60조의 세포 덩어리라고 합니다. 우리 모든 몸 뚱이가 세포 덩어리인데 이 세포도 끝없이 태어났다 죽었다를 반복한답니다. 그렇게 변화하면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또 어느 기록에 의하면, 그 세포가 우리 몸에서 완전히 한 번 바뀌는데 7년이 걸린 답니다. 그러니, 70년 살면 세포가 열 번이나 완전히 바뀐 몸을 갖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못 느끼고 살아요. 끝없이 자기 몸에 대해서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집착이 이기심을 유발해 가지고 모든 것을 비교하면서 우열을 따지고 좋은 자리, 좋은 위치, 더 좋은 것에 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육조 스님께서도 너희가 슬피 우는 건 집착해서 울지만, 실제 그 성품 자리에는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는 걸 알면 그렇게 슬피 울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육조 스님도 슬피 울지 마라. 슬피 우는 건 너희가 불교를 몰라서 그런다. 이 얘기입니다.

  너희들은 다 앉아라. 내가 너희에게 한 게송을 줄 것이니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이다.
  마지막 게송을 주는데 그 이름이 진가동정게이다. 뒤에도 서너 번 게송을 읊으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합니다.

  너희들은 다 외워서 이 게송의 뜻을 알면 나와 더불어 같다.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해서 종지를 잃지 말아라.”
  이 게송의 뜻을 알면 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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