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대법對法(3)
 
  대사께서 열 명의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후에 법을 전하되, 서로가 이 한 권의 《단경》을 전수하여 근본 종지를 잃지 말라. 《단경》을 이어받지 않으면 나의 종지가 아니다. 이제 얻었으니 대대로 유포하여 행하라. 《단경》을 얻은 이는 나를 만나 친히 준 것과 같다.”
  열 명의 스님들이 가르침을 받아 《단경》을 베껴 써서 대대로 널리 퍼지게 하니, 얻은 이는 반드시 견성할 것이다.

  이 가르침을 보면, 당시에는 육조 스님의 《단경》이나 오조 스님께서 제시한 《금강경》 같은 것을 굉장히 귀중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 법의 가치를 소중하게 봐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종이로 된 경전이나 《단경》 같은 것을 하찮게 여기는 잘못된 풍토가 있습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사상이나 말씀은 부처님과 똑같다고 봐야 합니다. 경전 하나하나도 옛날 사람들은 굉장히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이 《육조단경》 같은 책을 귀중하게 안 읽어요. 결국 법에 대한 귀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풍조가 생겨났지 않나 생각하는데, 경전이나 어록을 부처님 모시듯이 귀중하게 여겨야 됩니다. 이것을 보면 육조 스님께서도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불교를 이해하는 데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경전도 많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경전마다 표현이 조금씩 달라요. 그래도 하나를 말합니다. 그 하나가 불교의 핵심인데 바로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이 중도연기만 이해하면, 불교 전체를 회통하는 눈이 열립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 공부를 했겠지만, 불교의 핵심에 바로 들어가 이해하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이 《육조단경》이 어떤 경전이나 어록보다도 ‘중도연기’를 제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훨씬 뒤에 나온 간화선 지침서라 할 《서장》이나 《선요》와 비교해 볼 때, 뜻은 같은데 말이 훨씬 쉽습니다. 또 하나는 《서장》 《선요》는 화두를 통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것을 굉장히 강조했는데, 이 《단경》에서는 화두라는 말이 안 나와요. 여기에서는 공부하는 방법은 ‘지혜로 관조하라’ 입니다. 이때는 화두로 공부하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한테 시사해주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게 뭐냐? 육조 스님께서 “반야로써 관조해 보라” “지혜로써 관조하라”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불교 수행의 근본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정형화된 화두를 참구하게 되면서 수행의 기본틀인 생활에서 어떤 일이든지 지혜로써 관조해 보는 전통이 없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남방불교는 자기를 수행의 틀에다 맞춰 공부하는 방법이라면, 우리 대승은 자기 생활에 불교를 스며들게 하여 일상생활을 완성시켜 가는 공부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신 일상에서 반야로써 관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좋은 공부 방법이 지금 우리의 수행 과정에서 거의 빠져버린 거 같아요. 실제 화두 참선을 하거나 봉사나 염불, 간경, 주력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생활과 수행이 일치하지 못하고 따로 양립해 가는 현상이 있습니다. 수행 따로, 생활 따로 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수행보다도 생활이 더 현실이고 중요하니까 집착해서, 결국 수행자들이 세속화되어 가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로 심각합니다. 더구나 그 심각성을 느끼는 분도 별로 없어요. 이게 또 문제입니다.

  육조 스님은 간화선의 원류인 조사선을 만든 분이거든요. 이분은 그 당시 일상생활에 나쁜 일이든지 좋은 일이든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반야로서 관조해 보라. 그래서 그 반야로써 관조한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 가고 우리도 그 선상에서 수행해 가라 하신 것입니다.
  후대에 내려와서 간화선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만들면서 일상생활에서 반야로 관조하는 수행을 점점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조단경》을 통해서 처음 조사선이 시작된 시대에 수행하던 방법을 복원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자면 우리가 부처님께서 깨닫고 가르치신 불교의 기본 핵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견正見입니다. 물론 후대에도 간화선을 바르게 하신 분들은 그런 수행을 강조하셨습니다. 《서장》 《선요》의 여러 곳에서도 그것을 강조하십니다.

  《선요》에 나온 예를 든다면, 처음 참선하려 할 때 좌복에 조용히 앉아서 화두를 들기 전에 전제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평소 마음 속에 받은 일체 선악을 밑바닥까지 다 물리쳐서 털끝만큼도 남겨 두지 말고 …… 자리에 조용히 앉아 정념을 굳게 엉기게 하라.”

  우리가 참선하기 전에 10년, 20년, 또는 50년이 됐든지 그동안 마음에 일어났던 모든 것이 뭡니까? 결국 ‘내가 있다’는 전제로부터 나온 이기심의 번뇌 망상입니다. 그것을 밑바닥까지 물리쳐 남겨 두지 말아라. 이것이 가능한 얘기입니까?
  그런데 고봉 스님께서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신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나도 처음에는 이 말 뜻을 이해 못 했어요. 그 후 이해하게 되었는데, 결국 불교의 핵심은 중도연기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서 모든 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걸 알면, 그것이 곧 한 무더기로 만들어서 물리치는 거예요. 천 가지 망상, 만 가지 망상이 실체가 없고 연기 현상이고 공이라 하는 걸 알면 하나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공이라고 알게 되면 그게 털끝만큼도 남겨 두지 않고 물리치는 것이죠.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 반야로 관조하라. 지혜로 관조하라. 모두 이 말입니다. 반야 지혜로 관조하는 것이 분별 망상을 한 무더기로 만드는 것이고, 반야 지혜로 비추어 보는 것이 타방 세계에 버리는 겁니다. 간화선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을 하려는 사람은 이것이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불교는 이게 사라져 버렸어요. 이것이 한국 불교를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게 하고 있어요. 이래서는 한국 불교가 현상유지도 어렵습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그 대안이 바로 중도연기를 바로 아는 정견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육조단경》을 보면 전체 내용이 중도연기예요. 그동안 양변을 여읜 말을 할 때마다 강조해 드렸습니다. 양변을 여읜 그 자리가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뜻이고,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하는 그 자리이고, 부처님이 말하는 “무아無我” 그 자리이고, 결국 그 자리를 전부 설명한 겁니다. 경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표현이 다를 뿐이지 다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 주변을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 공부하는 데 시간도 단축하고 여러 가지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선禪이라고 해서 중도연기 밖에 있는 건 아닙니다. 중도연기를 이해하는 게 교敎라면, 체험하는 게 선禪입니다. 선이든 교든, 모든 불교 수행은 결국 중도연기를 이해하면서 그걸 체험하는 것이 수행이지, 교 따로 있고 선 따로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 당시에 했던 일상생활을 지혜로 관조하고 반야로 관조하는 그 가풍을 살려 내야 합니다. 우리 승가가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의 가치, 법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자꾸 흘러가는 시류에 따라가다 보니까 수행 종풍이 침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시류를 거부하고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부처님 법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렇게 따라 살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국불교가 살아납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현상유지도 힘들지 않겠느냐? 이런 현실에서 《육조단경》을 보면서 느낀 소감을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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