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대법對法(2)

  바깥 경계인 무정〔外境無情〕에 다섯 대법이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이고, 해와 달이 상대이며, 어둠과 밝음이 상대이며, 음과 양이 상대이며, 물과 불이 상대이다.

  말〔語〕과 말〔言〕이 대법하는 것과 법法과 상相이 대법하는 데에는 열 두 가지가 있으니,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유색有色과 무색無色이 상대이며,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이 상대이며,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상대이며, 색과 공이 상대이며, 동動과 정靜이 상대이며, 맑음과 탁함이 상대이며, 범부와 성인이 상대이며, 승僧과 속俗이 상대이며, 늙음과 젊음이 상대이며, 큼과 작음이 상대이며, 길다와 짧다가 상대이며, 높음과 낮음이 상대이다.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 데에 열아홉 가지 대법이 있으니, 삿됨〔邪〕과 바름〔正〕이 상대이고, 어리석음〔癡〕과 지혜〔惠〕가 상대이며, 미련함과 슬기로움이 상대이고, 어지러움과 선정이 상대이며, 계율과 그릇됨〔非〕이 상대이며, 곧음과 굽음이 상대이며, 실實과 허虛가 상대이며, 험함과 평탄함이 상대이며, 번뇌와 보리가 상대이며, 자비와 해침이 상대이며, 기쁨과 성냄이 상대이며, 버림과 아낌이 상대이며, 나아감과 물러남이 상대이며, 생生과 멸滅이 상대이며, 항상함〔常〕과 무상〔無常〕이 상대이며, 법신法身과 육신肉身이 상대이며,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상대이며, 본체〔體〕와 작용〔用〕이 상대이며, 성품〔性〕과 모양〔相〕이 상대이다.

  유정과 무정을 상대로 하는 언·어와 법·상에 열두 가지 대법이 있고, 바깥 경계인 무정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 데 열아홉 가지 대법이 있으니 모두 삼십육 대법을 이룬다. 이 삼십육 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달해서 나고 들어가는 데 양변을 여읜다. 어떻게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가?

  삼십육 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함께 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相〕에서 모양을 여의고, 안으로 들어가면 공空에서 공을 여의나니, 공에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모양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만 기른다.

  법을 비방하여 곧 말하기를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람이 말하지도 않아야만 옳을 것이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
  자성에 대하여 공을 말하지만, 바르게 말하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으니 미혹하여 스스로 현혹됨은 말이 삿되기 때문이다.

  어둠은 스스로 어두운 것이 아니라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고, 어둠은 스스로 어두운 것이 아니라 밝음이 변하여 어두운 것이다.”

  바깥 경계인 무정〔外境無情〕에 다섯 대법이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이고, 해와 달이 상대이며, 어둠과 밝음이 상대이며, 음과 양이 상대이며, 물과 불이 상대이다.
  우리 눈 밖에 객관 세계의 무정물에는 그 대법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관인데 객관 세계에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유정물도 있고 무정물도 있고, 생명 있는 것도 있고 생명 없는 것도 있는데 그 가운데 생명 없는 대상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말〔語〕과 말〔言〕이 대법하는 것과 법法과 상相이 대법하는 데에는 열 두 가지가 있으니,
  앞의 말〔語〕은 사량분별하는 말이고, 뒤의 말〔語〕은 양변을 여읜 말입니다. 양변을 여읜 말과 양변을 여의지 못한 말의 대對가 있고, 또 법과 상에 대법이 있는데 그것은 열두 가지가 있습니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유색有色과 무색無色이 상대이며,
유위는 양변에서 보는 것이고, 무위는 양변을 여읜 데서 보는 것이거든요.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이 상대이며,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상대이며, 색과 공이 상대이며, 동動과 정靜이 상대이며, 맑음과 탁함이 상대이며, 범부와 성인이 상대이며, 승僧과 속俗이 상대이며, 늙음과 젊음이 상대이며, 큼과 작음이 상대이며, 길다와 짧다가 상대이며, 높음과 낮음이 상대이다.
  앞에서 말한 것은 객관 세계이고, 지금은 법과 상을 말했습니다.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 데에 열아홉 가지 대법이 있으니,
자성, 즉 주관세계에 작용을 일으키는데에는 대법이 있는데 그것이 열아홉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세계가 아니고 주관세계입니다.

  삿됨〔邪〕과 바름〔正〕이 상대이고, 어리석음〔癡〕과 지혜〔惠〕가 상대이며, 미련함과 슬기로움이 상대이고, 어지러움과 선정이 상대이며, 계율과 그릇됨〔非〕이 상대이며, 곧음과 굽음이 상대이며, 실實과 허虛가 상대이며, 험함과 평탄함이 상대이며, 번뇌와 보리가 상대이며, 자비와 해침이 상대이며, 기쁨과 성냄이 상대이며, 버림과 아낌이 상대이며, 나아감과 물러남이 상대이며, 생生과 멸滅이 상대이며, 항상함〔常〕과 무상〔無常〕이 상대이며, 법신法身과 육신肉身이 상대이며,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상대이며, 본체〔體〕와 작용〔用〕이 상대이며, 성품〔性〕과 모양〔相〕이 상대이다.
  이런 상대되는 법으로 배우는 이를 제접할 때 삿된 것을 가지고 온 사람한테는 바름으로 대체해주고, 또 바르게 한다고 법상法相에 집착한 사람한테는 양변으로 그걸 여의도록 일깨워주고, 이렇게 대하는 방법을 예를 들어 말한 것입니다.

  유정과 무정을 상대로 하는 언·어와 법·상에 열두 가지 대법이 있고, 바깥 경계인 무정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 데 열아홉 가지 대법이 있으니 모두 삼십육 대법을 이룬다. 이 삼십육 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달해서 나고 들어가는 데 양변을 여읜다. 어떻게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가?
  우리가 양변에서 그것을 이해하면 안 되고 양변을 여읜 자리에서 삼십육 대법을 잘 이해하게 되면 일체 경전에 통달해서 들어가고 나갈 때 양변을 여의게 됩니다.
어떻게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가?

  삼십육 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함께 하나
삼십육 대법, 이것을 사람들이 말하기는 다 같이 한다 이 말이에요.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相〕에서 모양을 여의고,
이것은 양변을 여읜 사람이 하는 겁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공空에서 공을 여의나니, 공에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모양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만 기른다.
  바로 이런 말을 복잡하게 하니까 어떤 사람이 경을 비방해서 이런 말 하면 경을 비방하는 겁니다. 그 뒤의 말이

  법을 비방하여 곧 말하기를 ‘문자를 쓰지 않는다〔不用文字〕’고 한다.
이런 문자 쓰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렇게 우리가 얘기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렇게 얘기하게 되면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람이 말하지도 않아야만 옳을 것이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
‘문자를 쓰지 말라’고 하면서 그것을 말로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문자를 쓰지 말라’고 하면 아예 말하지 않아야 합당합니다. 문자를 쓰지 말라는 말이 곧 문자이니까 말을 하면 말하는 그 자체가 문자라는 거예요.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거사님이 공부가 안 된다고 하길래 나는 열심히 공부 잘 하라며 책을 소개해주니까, 이분이 말하기를 “우리 스님은 책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셔요. 그래서 “그 스님은 법문 안 하나?” 그러니까 “한 달에 한 번씩 합니다.” “그러면 귀로 법문 듣고 인식하는 것과 눈으로 문자 보고 인식하는 것하고 뭐가 다르나?” 내가 그랬어요. “책 보지 말라” 했으면 법문도  안 해야지요. 여기도 그런 말입니다.

  자성에 대하여 공을 말하지만,
자성이 양변을 여의었다, 공하다, 그 자리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이렇게 말을 하지만,

  바르게 말하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으니 미혹하여 스스로 현혹됨은 말이 삿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하면 허망하고 무상하고 아무것도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공한 자리에 또 공하지 않는 도리가 있고, 또 공하지 않고 팔팔 작용하는 곳에 공한 도리가 있거든요. 그냥 공했다고 하니까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어둠은 스스로 어두운 것이 아니라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고, 또 어둠은 스스로 어두운 것이 아니라 밝음이 변하여 어두운 것이다.”
  우리가 ‘어둡다’라고 할 때 밝음이 없고 어둠만 있으면 그것은 어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둠이란 것은 그런 것이니까, 누가 ‘어둡다’고 하면 ‘밝다’ 또 ‘밝다’ 하면 ‘어둡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서 오고 가는 것이 서로 원인입니다. 그것을 반대로 얘기해서 어둠에 집착한 사람은 어둠을 깨주고 또 밝음에 집착한 사람은 밝음을 깨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깨달은 사람한테 법 쓰는 법을 가르쳐준 말입니다. 우리가 깨치면 이 법 쓰는 법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양변을 여의면 저절로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기술이 미숙한 사람이 더듬거리고 뭘 잘못 하다가 숙달된 기술자가 뭘 만져 보라고 해서 만지면 시동이 걸리듯이 양변을 여의어 깨닫고 나면 저절로 알아지는 거니까 이것은 이 정도로 넘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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