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대법對法(1)
 
  대사께서 드디어 문인 법해, 지성, 법달, 지상, 지통, 지철, 지도, 법진, 법여, 신회를 불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열 명의 제자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라.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니,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너희들은 각각 한 곳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설법하는 것을 가르쳐 근본 종지宗旨를 잃지 않게 하겠다.
  삼과법문三科法門을 들고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對를 들어 나오고 들어감에 곧 양변을 여의도록 하여라.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性〕과 모양〔相〕을 떠나지 말라. 만약 사람들이 법을 묻거든 말을 다 쌍雙으로 해서 대법對法을 취하여 오고 가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

  삼과법문三科法門이란, 음陰·계界·입入이다. 음은 오음五陰이요, 계는 십팔계十八界요. 입은 십이입十二入이니라.
  무엇을 오음이라 하는가?
색음, 수음, 상음, 행음, 식음이다.
  무엇을 십팔계라 하는가?
육진六塵, 육문六門, 육식六識이다.
  무엇을 십이입十二入이라 하는가?
바깥의 육진과 안의 육문이다.
  무엇을 육진이라 하는가?
색·성·향·미·촉·법이다.
  어떤 것을 육문이라 하는가?
눈·귀·코·혀·몸·뜻이다.
  법의 성품〔法性〕이 육식六識인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과 육문六門과 육진六塵을 일으키고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니, 이름이 함장식含藏識이다.
  생각을 하면 곧 식識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진을 본다. 이것이 삼三·육六은 십팔十八이다.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게 된다.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고,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다.
작용은 무엇으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대사께서 드디어 문인 법해, 지성, 법달, 지상, 지통, 지철, 지도, 법진, 법여, 신회를 불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열 명의 제자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라.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니,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너희들은 각각 한 곳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설법하는 것을 가르쳐 근본 종지를 잃지 않게 하겠다.
  육조 스님께서 열 명의 제자들에게 중생을 제접하여 법을 설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려 하십니다. 양변에 집착하여 보는 그런 법을 쓰지 말고, 양변을 여읜 자리에서 자유자재하는 본래 종지를 여의지 말라 합니다.

  삼과법문三科法門을 들고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對를 들어 나오고 들어감에 곧 양변을 여의도록 하여라.
  ‘삼과법문’과 ‘동용삼십육대’를 설할 때에 그 법에 때로는 살殺로 때로는 활活로 할 것이고 때로는 체體로 때로는 용用으로 얘기할 것인데, 체와 용·살과 활이 같은 말입니다. 그것이 ‘나오고 들어가고’할 때에 모두 다 양변을 여의고 하라. 양변에 집착해서 법문하면 그것은 법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중생들이 집착해서 사견에 빠져버리니 법문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유를 말하든지 무를 말하든지 항상 양변을 여의는 그 자리에서 법문을 해야 듣는 사람이 양변을 여의고 해탈해서 자유자재하지, 양변에 집착하는 방향으로 법문을 해주면 그 사람을 구속하고 또 그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性〕과 모양〔相〕을 떠나지 말라.
여기 성품과 모양이라는 ‘성상性相’도 다른 책에는 ‘자성自性’이라 해놓았어요. 지금까지 배운 걸로는 ‘자성自性’이라 하면 이해하기 좋은데, 모든 법을 설할 때 자성, 즉 양변을 여읜 그 자리에서 법문을 해라. 그런데 성품과 모양을 여의지 말아라. 그러니까 이 성상은 양변을 여읜 성품과 모양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법을 묻거든 말을 다 쌍雙으로 해서 대법對法을 취하여 오고 가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
  유有에 집착한 사람은 무無로 답하고, 또 무에 집착한 사람은 유로 답하여 결국 유·무를 초월하도록 만들어라.


  삼과법문三科法門이란, 음陰·계界·입入이다. 음은 오음五陰이요, 계는 십팔계十八界요. 입은 십이입十二入이니라.
무엇을 오음이라 하는가?
색음, 수음, 상음, 행음, 식음이다.
무엇을 십팔계라 하는가?
육진六塵, 육문六門, 육식六識이다.
무엇을 십이입十二入이라 하는가?
바깥의 육진과 안의 육문이다.
무엇을 육진이라 하는가?
색·성·향·미·촉·법이다.
어떤 것을 육문이라 하는가?
눈·귀·코·혀·몸·뜻이다.
  법의 성품(法性)이 육식六識인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과 육문六門과 육진六塵을 일으키고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니, 이름이 함장식含藏識이다.

  법의 성품이 안이비설신의 육문을 일으킵니다. 또 육진도 일으키는데요. 육진六塵은 뭔가요? 육조 스님은 색성향미촉법이라 했는데, 우리의 대상 경계인 삼라만상이 다 육진입니다. 그러면 이 법성에서 우리 의식도 일으키고, 또 육근도 만들고, 우리 눈 밖에 있는 삼라만상도 다 만든다는 것입니다. ‘전부 마음이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말이죠.
  우리는 마음이 안이비설신의를 만든다는 것은 이해하지요. 그런데 우리 눈 밖의 삼라만상도 마음이 만든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법성이나 마음이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인식하고 있는 축소된 그것과는 개념이 다르지요. 그래서 이 마음이나 법성은 굉장히 넓은 뜻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고 하는 이 좁은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일체유심조’할 때 그 ‘유심’은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큰 거예요. 지금 내 안에서 듣고 보고 하는 것도 그것과 다르진 않지만 엄청나게 큰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주 삼라만상을 일으킨 것을 법성法性, 개개 단위 개체를 일으키는 것을 자성自性이라고 합니다. 바닷물과 파도로 비유해 본다면,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수천수만 가지가 일어나잖아요. 뚱뚱한 파도, 날씬한 파도, 높은 파도, 낮은 파도 ... 그 파도는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바닷물에서 일어나고 있지요. 모양만 날씬한 파도나 뚱뚱한 파도로 보이지 다 바닷물입니다. 이와 같이 그 날씬한 파도, 뚱뚱한 파도에 국한된 물을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파도 전체는 법성法性이라 하고요.
  육조 스님은 법성이 육식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과 육근, 육진을 일으켜서 자성에 그 모든 객관, 주관이 다 만법을 포함하니 이름을 함장식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생각을 하면 곧 식識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진을 본다. 이것이 삼三·육六은 십팔十八이다.

  함장된 마음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이 ‘있다-없다’‘나다-너다’ 입니다. 이 생각을 일으키면 식이 작용해요. 파도가 일어나듯이 작용해서 육식이 거기에서 생겨 또 육문을 나와서 육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대목을 보면서 육조 스님은 우리의 존재원리를 생성원리로도 설명하셨고, 또 우리가 작용하는 과정도 간단하지만 설명하신 겁니다. 이분은 깨달은 도인道人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말을 믿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법성을 바다에 비교했는데, 큰 바다에 바람이 부는 것은 작용하는 것이니 그러면 뚱뚱한 파도, 날씬한 파도, 높은 파도, 작은 파도, 큰 파도 이렇게 삼라만상이 벌어집니다. 그 파도 중에는 생명이 있는 파도, 생명이 없는 파도도 있습니다. 《금강경》에 아홉 가지가 나오지요. 그 아홉 가지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중생과 유정有情, 무정無情,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非有想, 비무상非無想 전부 법성 속에 있습니다. 그 법성은 큰 바다로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법성이 실제 있는 것이냐? 《열반경》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 뜻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말장난하느냐고 하겠지만, 절대 말장난이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유식有識에서도 ‘유식무경有識無境’이라 합니다. 오직 식識만 있지 경계는 없다 는 소리도 거의 비슷한 말입니다.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삿된 것, ‘있다-없다’ 이렇게 양변으로 보면 열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납니다.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 ‘바름을 포함하면’은 양변 여읜 것을 보면, 열여덟 가지 바른 것이 일어납니다. 또 그 말을 다시 되풀이해서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고,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다.
악의 작용은 양변입니다. 이 선의 작용〔善用〕은 양변을 여의어 쓰는 겁니다.

  작용은 무엇으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작용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느냐? 그것은 자성이 대법對法, 즉 ‘있다-없다’ 하기 때문에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기 자성에서도 ‘있다-없다’를 초월해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부처입니다. 부처가 불행佛行이고, 자성에서 ‘있다-없다’ 양변으로 작용을 일으키면 중생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작용 일으키는 것도 두 가지 내용이 있다고 봐야 됩니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이 법 쓰는 것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우리는 못 깨달은 입장에서 이걸 이해하려고 하니까 어렵습니다. 어렵지만, 육조 스님께서 법성이 모든 만물을 일으키고, 자성과의 관계를 간단히 언급한 것만으로도 굉장히 좋은 법문입니다. 나는 이걸 보면서 “아! 육조 스님이 이렇게도 이야기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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