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부처님의 행佛行(2)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와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육조 스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바로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명하셨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한 것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에 분명히 ‘다른 승乘이 있지 않고 오로지 일불승一佛乘뿐이다’라고 하셨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을 듣고 이불승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 중에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 너에게 말하리라.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이상의 열여섯 자는 바른 법이다.〕 이 법은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을 들으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하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사견邪見을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다.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을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상相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空에 집착한다. 상相에서 상을 여의고 공空에서 공을 여의는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覺〕인데, 네 문〔四門〕으로 나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開〕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치는 것〔悟〕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다.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바로 세상에 나오는 것〔出世〕이다.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와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육조 스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바로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명하셨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한 인연이니라.
《법화경》 일곱 권은 분량이 굉장히 많거든요. 육조 스님께서 듣기에는 많은 말이 모두 하나다. 전부 우리 존재원리를 비유해서 얘기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한 것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이 《법화경》에서 말씀하시는 삼승三乘, 즉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은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한 방편이지 본래 법 자체는 그런 게 아닙다.

  경 가운데에 분명히 ‘다른 승乘이 있지 않고 오로지 일불승一佛乘뿐이다’고 하셨다.”
손가락으로 볼 때는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을 나눌지라도, 달의 입장에서 보면 오직 일승밖에 없습니다. 다만, 둔한 사람을 위하여 삼승을 설해서 점진적으로 끌어올려 깨닫게 하려는 것이지 실제 내용은 일승밖에 없어요.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을 듣고 이불승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 중에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 너에게 말하리라.
  성문, 연각 등 삼승을 구하여 너의 성품을 오히려 미혹하게 하지는 말아라. 경 가운데에 일불승 그 자리를 너를 위해서 설해주겠다.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이상의 열여섯 자는 바른 법이다.〕
  이 일대사인연이 뭐냐? 뒤에 나오지요. 일대사인연 때문에 나오신 것이지, 다른 것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오신 것도 아니고 다른 것 때문에 법문을 설하신 것도 아니다. 일대사인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이 법은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을 들으라.
이 법은 바로 일대사인연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생각하지 않으면
여기에는 ‘생각하지 않으면’ 했는데 ‘양변을 여의면’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양변으로 보기 때문에 사량분별을 하는 겁니다. 양변을 여의면 사량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지요.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사견邪見을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다.
이 사견邪見은 ‘있다-없다’로 보는 것을 말하지요. ‘너다-나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를 초월하면 사견을 떠나는데, 이 삿된 견해를 여읜 것이 바로 일대사인연이라 한다.
  이 ‘일대사인연’은 이름만 다르지 ‘양변을 여의라’는 소리예요. 자성, 법성, 불성이라는 것도 다 똑같아요.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 《법화경》 일곱 권이 분량은 많지만, 많은 말이 없다,  양변을 여의라 말뿐이다 하신 겁니다.
  이 일대사인연은 여기에서는 자성자리에서 양변을 여의어 무심無心된 그 상태로 설명했는데, 또 다르게는 평상심平常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무심, 양변을 여읜 자리, 불성, 법성 하는 말은 일대사인연과 같은 말입니다.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을 떠난다.
안으로는 양변을 여읜 것이고, 밖으로는 어떤 물건이라도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는 것이 내외가 미혹하지 않는 겁니다. 내외가 미혹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는데 간단한 거예요. 또 그렇게 보는 게 내외가 청정한 것이죠. 앞에서 생각생각이 반야로 관조한다는 말과 같아요.

  밖으로 미혹하면 상相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空에 집착한다. 상相에서 상을 여의고 공空에서 공을 여의는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보세요. 상을 없애 상을 여의는 게 아니고 상에서 그냥 상을 여의어요. 또 공에서 공을 없애어 공을 여의는 게 아니고 공에서 그냥 공을 여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양변을 안팎으로 공하고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 한 생각에 마음이 열려요. 운개일출雲開日出하지요. 양변을 여의면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저절로 나오잖아요. 해 나오는 게 마음이 열리는 겁니다.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그것이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부처님이 태어나야 세상에 출현한 것인데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이 바로 마음에 부처님이 출현한 거예요. 그러면 개개인이 분별심, 즉 양변을 여의어 이 생각 저 생각 작용을 일으키는 순간순간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꼭 석가모니 부처님만 2,600여 년 전에 출현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양변을 여의든 안 여의든 부처님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죠.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여는 것이다.
이게 어렵지요. 양변을 여읜 자리에서 나오는 작용이 전부 부처님 지견이에요. 부처님 지견이라고 특별히 다른 게 아닙니다. 양변만 여의면 생각생각 일어나는 그 자체가 모두 부처님 지견이 열려서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꼭 부처님만이 오셔서 지견을 여는 것이 아니죠.

  부처님은 깨달음〔覺〕인데, 네 문〔四門〕으로 나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開〕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치는 것〔悟〕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다.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개시오입開示悟入이죠. 여기에서는 한 사람이 하는 걸로 되어 있어요. 다른 곳에는 깨달은 사람이 열어 보이면〔開示〕 못 깨달은 사람이 깨달아 들어간다〔悟入〕고 풀이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돈황본》에서는 한 사람이 개시오입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양변을 여읜 데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이고, 또 그것이 보이는 것이고, 또 그것이 깨달은 것이고, 또 그것이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 들어간다는 그 한 곳이 바로 양변을 여읜 그 자리입니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바로 세상에 나오는 것〔出世〕이다.
  깨달음의 지견으로 본성, 즉 양변을 여읜 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出世〕’가 좀 이상해요. 나는 출가出家로 바꾸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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