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부처님의 행佛行(1)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법달法達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운 지 7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정법의 당처當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니 의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깊이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너의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정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다.”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법달法達이라 하였다.
덕이본에 보면, 법달 스님이 일곱 살에 출가해서 육조 스님한테 가서 절할 때 이마가 바닥에 안 닿게 하자 육조 스님이 아만을 부린다고 굉장히 꾸짖는 대목에 나오는데 바로 그분입니다.

  항상 《법화경》을 외운 지 7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정법의 당처當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7년 동안이나 《법화경》을 외웠는데 부처님이 이 경에서 전하신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니 의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스님께서는 지혜가 굉장히 넓고 큰 분이니, 경을 보다가 생긴 의심을 해결해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깊이 통달하였으나
법이란 것은 그 자체가 깊이 통달해 있는 겁니다.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경전에 무슨 의심이 있겠어요. 우리 존재원리는 있는 그대로 본래 부처로 되어 있으니 거기에 의심하고 말고 할 게 없어요. 양변을 여읜 그 자리에 의심할 게 있습니까? 법달法達이라 할 때 그 법도 본래 스스로 다 통달해 있는데, 다만 마음이 통달해 있지 못한 것이다. 경에 의심이 있다는 것도,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지 경에는 의심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일화가 하나 생각이 나네요. 전에 박학다식한 것으로 유명하신 어느 스님께서 《화엄경》을 번역할 때 오자가 있다고 교정한다고 하니까, 어느 수좌 스님이 “‘《화엄경》에 오자가 있다’는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스님께서 교정한다는 것은 종이에 인쇄된 《화엄경》을 얘기한 것이죠. 그런데 질문한 수좌는 《화엄경》은 본래 성불한 그 자리를 표현한 경이니 거기에 오자가 있다 없다 하면 틀리다는 말이었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물었는데 스님께서 어떻게 답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흰 종이에 인쇄된 《화엄경》을 《화엄경》이라 생각해서 대답했다면 틀렸을 것이고, 우리 마음을 경전으로 보셨다면 바른 답을 했겠지요.

  너의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정법을 구하는구나.
네 마음의 경을 보면 ‘정법이다-사법이다’를 초월하는데, 그걸 못 보고 흰 종이에 활자화된 경을 보면서 의심이 있다, 없다 하는구나. 마음의 경에는 의심이라는 것이 없는데, 거기에 있다고 보는 네가 잘못되었다. 스스로 삿되면서 정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다.”
  육조 스님은 글자를 모르니까, 그 경을 가지고 와서 읽으면 듣고 법을 알 것이니, 읽어 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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