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행修行(6)


번뇌를 타파하는 게 아니라 지혜로 변하게 한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요, 나의 죄는 스스로 죄 있음이니
  오직 스스로 잘못된 마음을 보내고〔去〕 번뇌를 타파하도다.
우리가 그 본질만 보면 잘못된 마음도 보낼 것 없어요. 그 자리에서 변해버리지요.
  전에 조계사에서 참선을 주제로 법문한 적이 있는데 한 신문에서 제목을 “참선은 번뇌를 세탁하는 세탁기다” 이렇게 했어요. 사실은 그렇게 얘기한 게 아니고 “번뇌를 도리로 변화시키는 세탁기다”라는 뜻에서 했어요. 그런데 변화시킨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쓴 듯한데 여기에도 그렇습니다. 보낸다〔去〕고 하는데 옳지 못한 마음을 보내고 좋은 마음을 갖고 오는 게 아니라 옳지 못한 마음인 ‘나다-너다’ 하는 그 마음이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보내는 게 아니라 변하는 것입니다.
  번뇌를 타파하는 것도 아니고 번뇌도 지혜로 변하는 겁니다. 잘못된 마음인 ‘나다-너다’ 하는 마음이 ‘나다-너다’를 초월한 마음으로 바뀌면, 번뇌도 지혜로 바뀌어버리는 겁니다. 어디로 보내는 게 아니에요.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려면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니
  그의 의심을 깨뜨리지 말아라. 곧 보리가 나타나리라.
이 의심이라는 말이 중간에 나오는데요. 항상 화두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다 보니까 화두를 타파하지 말라는 말인가 해서 몇 번 봤어요. 그런 뜻이 아니라 앞에 “세간에서 어떻게 수행을 합니까?” 하고 물은 것을 말합니다. 그 의심을 깨뜨리지 말아라. 곧 보리가 나타나리라.
  세간과 출세간이 하나다. “세간에서 어떻게 도를 닦습니까?” “의심할 필요 없다. 세간이 바로 출세간이고 세간이 바로 도다.” 그러니 의심을 깨뜨리지 말아라.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세간을 없애고 출세간으로 가는 게 아니고 세간이 그대로 출세간으로 바뀌는 거예요.
  어떻게 바뀌느냐? 양변을 여의면 바뀌는 겁니다.

  세간을 떠나서 밖으로 세간 벗어나는 법〔出世間〕을 구하지 말라.
세간, 즉 시장을 떠나 산중에 가서 밖으로 출세간을 구하지 말아라. 세간 그 자체가 도다. 세간과 도가 둘이 아니다. 그리고 세간에서 공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는 의심 따위는 하지 말아라.

  삿된 견해〔邪見〕가 세간이고 바른 견해〔正見〕가 세간 벗어남이다.
삿된 견해〔邪見〕-바른 견해〔正見〕라고 할 때 이 삿된 견해가 뭡니까? ‘나다-너다’ 양변에서 보는 견해가 삿된 견해입니다. 어디에 따로 희한한 견해가 있는 게 아니에요. 신통묘용神通妙用을 추구하는 것도 삿된 견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건 지엽적인 것이고 근본 사견은 ‘있다-없다’의 양변입니다.
  우리가 다른 종교를 외도外道라 하고 사교邪敎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것도 지엽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 종교 - 너희 종교’ 갈라놓는 불자라면, 그 사람은 불교의 근본을 모르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하나님도 부처님으로 본다.

  불교에서는 하나님도 부처님이에요. 부처님이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로 존재한다”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하나님도 연기예요. 연기가 뭡니까? 실체가 없이 서로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부처님, 석가 부처님, 공자 부처님, 노자 부처님, 장자 부처님, 마호메트 부처님, 브라만 부처님, 태극 부처님 하면 하나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지 않고 저것은 불교가 아니니 나와 다른 종교다, 이렇게 양변으로 나눠 보면 사교에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서 대립과 갈등, 투쟁, 전쟁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 종교만 바른 종교이고, 너희는 사교라 하니 총칼 들고 싸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행히 불교는 그렇게 연기로 보는 안목을 가진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총칼 들고 전쟁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지구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갈등이 종교전쟁이지요. 부시는 하나님한테 빌고, 빈 라덴은 알라신한테 빌잖아요. 결국 종교 갈등이에요. 이런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유일하게 불교에 있습니다. 이 ‘중도연기中道緣起’를 알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참으로 위대한 분이에요. 그런데 제자들이 못나서 서로 싸우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좋은 법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도 못하고 있으니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주지 소임 맡은 스님들은 현장에서 봉사하고 포교하는 분들이잖아요. 포교를 이렇게 해야 되는데, 세속 사람들처럼 옳다 그르다를 나눠 놓고 시시비비하고 상담해주다가는 부부싸움 붙이기 딱 좋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삿된 견해이면 재가고, 정견이면 출가다. 이렇게 해놓고 또 육조 스님은 끝에 가서 삿됨〔邪〕과 바름〔正〕을 다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이 바름〔正〕이 양변을 여읜 자리이기 때문에 나쁜 건 아닌데, 이 바름에 집착하면 법상法相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것마저도 초월하라고 하십니다.

  삿됨〔邪〕과 바름〔正〕을 다 쳐 없애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다.
  이것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이며, 또한 대승大乘이라 한다.
뭘 없애고,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대승입니다.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이나 깨달음은 찰나다.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나, 깨치면 곧 찰나간이다.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는데 깨달음은 곧 찰나간이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우리가 “닦는다는 것은 아직 착각의 세계에서 닦는 것이고, 그것은 현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단박 가르침〔頓敎〕이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놓으시면 좋겠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봉양하다가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지견知見이 나서 오조 홍인 스님한테 출가하여 8개월 만에 확철대오해서 교화하여 온 얘기를 이 《단경》에서 쭉 해왔는데 얼마 안 가면 당신 입적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요즘 말로 하면 육조 스님의 자서전과 비슷합니다. 한 생을 얘기하셨어요. 이 내용 가운데 육조 스님은 깨달음의 세계를 굉장히 강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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