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행修行(4)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으면 일체가 다 방해롭지 않으니
항상 자기 허물을 드러내면, 도와 더불어 서로 합하도다.
형상〔色類〕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여의고 따로 도를 찾는구나.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니 마침내 오히려 스스로 고뇌하는구나.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 바름을 행하는 것〔正行〕이 도다.
스스로 바른 마음〔正心〕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한다.
만약 참으로 도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으니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 됨이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요, 나의 죄는 스스로 죄 있음이니
오직 스스로 잘못된 마음을 보내고〔去〕 번뇌를 타파하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려면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니
그의 의심을 깨뜨리지 말아라. 곧 보리가 나타나리라.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것이다.
세간을 떠나서 밖으로 세간 벗어나는 법〔出世間〕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邪見〕가 세간이고 바른 견해〔正見〕가 세간 벗어남이다.
삿됨〔邪〕과 바름〔正〕을 다 쳐 없애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다.
이것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이며, 또한 대승大乘이라 한다.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나, 깨치면 곧 찰나간이다.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으면 일체가 다 방해롭지 않으니
  세간에서 도를 닦아도 방해될 게 없습니다. 꼭 산중에서만 도 닦는 건 아니지요.
  원효 스님은 산에서 공부를 안 하더라도 재가에 있는 사람보다 낫다고 <발심장發心章>에서 얘기했는데, 그것도 방편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실제 달의 입장에서 보면 산에 있거나 재가에 있거나 도 닦는 데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재가에 있는 그대로가 진리입니다. 우리가 나눠 놓고 보니까 ‘망이다-진이다’ 하지, 달의 입장에서 보면 재가에서 밥 먹고 일하고 잠자는 모든 행위가 그대로 진리입니다. 생활 그대로 진리가 되려면 ‘진이다-망이다’ ‘재가다-출가다’를 여의면 됩니다.
  그런데 그걸 둘로 나눠 놓고 차별하여 보니까 재가가 나를 굉장히 괴롭게도 만들고, 또 부자연스럽게도 만들고 그러는 거예요. 이게 둘이 아닌 걸 알면 전혀 방해될 게 없어요.

근본 허물은 양변을 나누는 것이다.

  항상 자기 허물을 드러내면, 도와 더불어 서로 합하도다.
  자기의 허물이 뭐냐?
  남을 미워하거나 욕한 것도 허물이지요. 하지만 이건 지엽적인 허물입니다. 근본 허물은 ‘있다-없다’ ‘나다-너다’ ‘좋다-나쁘다’하고 양변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 허물이고, 여기에서 파생되어 누구를 미워하거나 욕하는 것은 지엽적인 겁니다. 이 허물을 항상 드러내면 고치는 것이니 도와 더불어 서로 계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형상에 끄달리거나 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형상에 매달려서 이것은 불교, 이것은 비불교, 이것은 더럽고, 이것은 깨끗하다, 이렇게 끄달리며 속박되어 살지요. 항상 자기 허물을 드러내는 사람은 형상에 매달리지 않아 자유자재하게 살 수 있습니다.

  형상〔色類〕 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색류色類’란 형상形相을 말합니다. 형상은 스스로 도가 있어요. 양변을 여의면 그 형상 자체가 바로 도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 봅시다. 금과 똥은 색이 같지요? 그런데 우리는 금은 좋고 똥은 나쁘다 이렇게 보는데, 양변을 여읜 자리에서 보면 똥이나 금이나 평등합니다. 물론 평등하다고 똥을 장롱 속에 갖다 놓는다든지, 금덩어리를 밭에 거름으로 쓰지는 않아요. 똑같이 평등하게 보면서도 용도를 정확히 알아 그에 맞게 쓸 뿐입니다. 그럼 똥은 어디에 쓰느냐? 거름으로 씁니다. 금은 그릇 만드는 데 씁니다. 그릇은 좋고 거름은 나쁘다 그런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여기 형상에는 스스로 도가 있다는 말은 똥 속에도 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똥만이 아니죠. 일체 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도를 여의고 따로 도를 찾는구나.
그 형상 속에 도가 있는데, 그 도를 여의고 특별하게 도를 찾고 있구나!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니 마침내 오히려 스스로 고뇌하는구나.
  우리가 양변을 여읜 자리에서 보면 다 도입니다. 양변에서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 이렇게 형상에 매달리다 보면 스스로 고뇌하게 됩니다. 우리 일상생활에 그런 게 참 많아요. 요즘 젊은이들 ‘몸짱’ ‘얼짱’ 하는 말도 이런 문제죠.
  세상 사람들이 이런 쓸모없는 데 에너지 소모를 많이 하고 시시비비하고, 정말 비생산적인 것을 많이 하고 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육조 스님 법문을 통해서 비생산적인 것에 에너지 소모를 하지 말고 생산적이고 유용한 것에 써야 합니다.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람들은 낭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학대합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든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서 비교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것을 해소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해소하려면 지엽적인 여러 가지 공부를 해서 이렇게 저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가장 효과적인 공부는 근본을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양변을 나누는 것을 여의는 공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양변을 나누는 허물에서 벗어나 정말 생산적이고 유용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교화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이 원리를 발견해서 우리 승가에 유산으로 전하여 사자상승하게 하셨고,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를 부촉하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부터 그런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도 괴롭히고 남도 함께 괴롭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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