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행修行(3)

 
공부 방법 때문에 다투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그런데 공부 방법을 두고 다투는 것은 불교와 전혀 맞지 않아요. 간혹 돈오돈수-돈오점수를 주장하는 분들이 자기 견해에 집착하여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것은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점 논쟁을 하는 분들은 모두 한결같이 육조 스님을 조상으로 인정합니다. 중국에서는 오조 홍인 스님 이후에 신수 스님과 육조 스님이 돈·점으로 나눠졌지요. 좀 범위를 넓혀 불교에서는 각자 근기에 맞게 선禪이 아니더라도 위빠사나나 염불, 간경, 봉사 다 방편으로 인정합니다. 이 방편을 통해 깨닫게 되면 손가락이 달이 되고 달이 손가락이 되어, 둘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둘이 됩니다.
  외도外道가 와서 욕하더라도 연민으로 보고 감싸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같은 불교를 하면서 법에 대하여 서로 감정적으로 대립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서로 연민을 가져야지요.

  다만, 이 《육조단경》도 그렇고, 조사선-간화선의 선문禪門에서는 점수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비슷한 말은 하지요. “불행수행佛行修行한다”  “부처님 행을 닦는다” 하거든요. 그럼 “부처님 행을 닦는 건 보림保任3) 아니고 뭐냐?” 이렇게 얘기하는 분이 있는데 이것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 부처님한테 향 꽂고 마당이 지저분하면 빗자루 들고 마당 쓰는 평상심을 말하는 것이지 무엇이 부족해서 부처님 행을 닦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 나와 삿된 종〔邪宗〕을 깨뜨린다
여기 ‘삿된 종〔邪宗〕’이란 것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만, ‘있다-없다’ ‘나다-너다’ 갈라놓는 것을 삿된 종이라 보면 됩니다.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으나
돈교법頓敎法에는 돈頓도 없고 점漸도 없다.
‘돈도 없고 점도 없다’ 하는데, 왜 돈오돈수라 주장하느냐? 돈오돈수 입장에서는 이 “돈오돈수라는 말 자체가 돈·점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미혹함〔迷〕과 깨침〔悟〕에 더디고 빠름이 있으니
미혹하고 깨달음에 더디고 빠름이 있는 것이지 본래 돈법頓法에서는 돈점頓漸이 없다.

  만약 돈교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하지 않으리.
돈교법을 배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도 미혹하지 않는다. 왜 돈교법에는 미혹하지 않는가? 돈교법에서 보면 돈점이 없어요. ‘돈이다-점이다’ 이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생이다-부처다’, ‘깨달았다-못 깨달았다’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돈오돈수법이라 합니다.

설명하자면 비록 만 가지가 되나,
여러 가지를 합하면 다시 하나로 돌아가나니
번뇌의 어두운 집 가운데에
항상 지혜의 해를 떠오르게 하라.
삿됨이 오면 번뇌로 인함이고,
바름〔正〕이 오면 번뇌가 없어진다.
삿됨〔邪〕과 바름〔正〕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음이 없는 데 이른다.
보리는 본래 청정한데
마음이 일으키니 곧 망상(妄想)이라.
청정한 것이 망념(妄念) 가운데 있으니
오로지 바르면〔正〕  세 가지 장애〔三障〕를 없앤다.

  설명하자면 비록 만 가지가 되나, 여러 가지를 합하면 다시 하나로 돌아가나니
  이것은 돈교법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돈오돈수-돈오점수도 있고, 부처-중생도 있고, 번뇌-지혜도 있는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흩어진 것을 돈교법에 통합해 놓으면 하나로 돌아가요. 전부 다 하나다. 거기에는 중생-부처도 없습니다.

  번뇌의 어두운 집 가운데에 항상 지혜의 해를 떠오르게 하라.
번뇌의 어두운 집이란 미혹한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 가운데 항상 지혜를 내어라. 지혜를 어떻게 내느냐? ‘있다-없다’를 초월하면 지혜가 저절로 나옵니다. 지혜를 낸다고 무슨 다른 수행, 즉 기도·간경·참선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간단히 얘기하면 그런 행위도 ‘나다-너다’ 하는 것을 초월한 자체가 지혜를 내고 있는 겁니다. ‘나’라는 것을 없애버리면 항상 지혜롭게 됩니다.

  삿됨이 오면 번뇌로 인함이고, 바름〔正〕이 오면 번뇌가 없어진다.
‘나 다-너다’ 하는 번뇌가 오기 때문에 삿된 것이 오고, ‘나다-너다’가 없는 상태가 되면 번뇌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바름〔正〕’이라 하는 것도 결국 ‘나다-너다’가 없어진 그 자리가 바름이고, ‘나다-너다’가 있는 것이 삿된 것입니다.

결국,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게 정답이고, 정견이다.

  결국 우리가 천 가지, 만 가지를 얘기하더라도 ‘나다-너다’ 하는 이 양변이 문제예요. ‘나눠 놓고’ 생각하는 것, 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을 없애는 것이 공부입니다. 또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보고 이해하는 것이 정견正見입니다.
  불교는 천 가지 만 가지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전부 여기에 있는 겁니다. ‘나’라는 게 본래 없는 줄 알면, 천 가지 만 가지 수행이 그 속에 있는 겁니다. 기도하든, 간경하든, 봉사하든, 참선을 하든 모두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우리가 《육조단경》을 계속 공부하지만 결국, ‘나’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 이게 정답이고, 이 얘기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반야심경》의 “오온개공”을 아는 사람이 돈교법을 아는 사람.

  초기불교에서 정견正見은 사성제·팔정도·십이연기를 이해하는 것인데, 대승불교의 정견은 《반야심경》입니다. 대승불교에 최초로 나온 경전이 반야부 계통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요약한 것이 《반야심경》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핵심이 “오온개공五蘊皆空” 네 자입니다. 이게 불교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돈교법을 아는 사람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이 부처님이고, 이것을 체험한 사람이 도인道人이고, 이게 정견正見입니다. 그래서 항상 염두에 두고 정말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오온개공, 즉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하다’라는 것을 자꾸 상기하셔야 합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자꾸 밖에 있는 게 좋아 보여요.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그것을 이해라도 해야 밖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이 가치를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꾸 정견을 갖춰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전부 그 얘기입니다. 돈교법도 돈오법, 설통, 심통, 마음의 지혜를 내라든지 또 바른 것이 오면 번뇌가 없어진다든지, 이것이 전부 정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다’는 걸 알면 사실 이런 군더더기 얘기가 필요 없지요.

  삿됨〔邪〕과 바름〔正〕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음이 없는 데 이른다.
  삿됨과 바름에서 바름에 집착하니, 그건 법상法相에 집착하는 것이라 이 두 개도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와 정을 같이 쓰지 않고 그것이 없으면 청정해져요. ‘남음이 없는 데 이른다’는 말은 조금도 미진한 게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청정淸淨’이란 ‘정正-사邪’, ‘부처-중생’ ‘범凡-성聖’, ‘진眞-망妄’ 이런 양변을 초월한 그 자리를 말합니다.

망상 가운데 청정한 것이 있다.

  보리는 본래 청정한데 마음이 일으키니 곧 망상(妄想)이라.
  청정한 것이 망념(妄念) 가운데 있으니
  우리는 ‘내가 있다’고 생각해서 망상 가운데 있는데, 그 망상에 청정한 것이 없느냐? 청정한 것이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에 파도와 물의 비유가 나옵니다. ‘파도는 망상이라고 보면, 물은 그 성품이기 때문에 청정하다’는 말도 그런 비유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방편으로 그런 말을 쓰지, 달 입장에서 보면 파도나 물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파도는 하나의 작용이고 물은 비작용이거든요. 그래서 파도와 물을 ‘진眞-망妄’으로 보는 것은 손가락에서 하는 얘기이고, 그것을 진망으로 보지 않고 작용과 비작용, 살殺과 활活, 체體와 용用, 이렇게 보는 것이 달의 입장입니다.

  오로지 바르면〔正〕 세 가지 장애〔三障〕를 없앤다.
이 ‘바름(正)’도 양변을 여읜 바름, ‘깨끗하다-더럽다’를 여읜 ‘정淨’으로 보셔야 합니다. ‘나다-너다’를 여의면 탐·진·치 세 가지 장애〔三障〕도 없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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