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행修行(2)    

  위사군이 물었다.
“화상이시여, 세속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가르쳐주십시오.”
  대사가 말하되, “선지식아, 혜능이 수행자와 속인을 위하여 ‘모양 없는 게송〔無相頌〕’을 지어줄 것이니 다들 외워 가져라.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항상 혜능과 같이 한 곳에 있는 것이다.”

재가에서는 어떻게 수행하는가?

  위사군이 물었다.
“화상이시여, 세속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가르쳐주십시오.”
  절에 있더라도 닦지 않으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있으면서 마음이 나쁜 사람과 같고, 재가에서도 수행하면 동방 사람이 선한 것을 닦는 것과 같다고 하니까, 위사군이 육조 스님께 “큰스님, 어떻게 하면 재가에서 닦는 겁니까?” 하고 묻습니다.

  대사가 말하되, “선지식아, 혜능이 수행자와 속인을 위하여 ‘모양 없는 게송〔無相頌〕’을 지어줄 것이니 다들 외워 가져라.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항상 혜능과 같이 한 곳에 있는 것이다.”
  “재가에서 어떻게 수행하나요?” 하고 물으니까 ‘모양 없는 게송, 무상송無相頌’을 하나 지어줄 테니 그것을 의지하여 닦으면 얼마든지 공부하여 견성도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함이여!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다.
오직 돈교법頓敎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邪宗〕을 깨뜨린다.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으나
미혹함〔迷〕과 깨침〔悟〕에 더디고 빠름이 있으니
만약 돈교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하지 않으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함이여!
  이 설법도 통달하였다는 ‘설통說通’이라는 말보다 ‘종통宗通’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여기에선 설통이라 했어요. 종통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종통은 우리 종지, 본분 그 자리를 통하여 자유자재하는 분을 ‘종통했다’ 하고, 그렇게 종통한 분은 또 말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설통說通이라 합니다. 말 잘하는 걸 설통說通이라 하는 게 아니고, 양변을 여의고 종지宗旨에 어긋나지 않고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설통하고 종통이 하나입니다. 그러면 무엇과 같느냐.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다.
  앞에서도 “운개일출雲開日出”이라는 말을 썼어요. ‘나다-너다’ 양변을 여의면 바로 구름이 흩어져 허공이 된 상태이죠. 구름이 걷히면 해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렇게 된 상태를 종통이라 한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에 비교한 건데 ‘나다-너다’ ‘있다-없다’ 이것을 여의어 버리면, 해가 나오듯이 마음 속에 허망하고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한 사람은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이 진공이 되어 거기에서 묘유가 나와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는 그런 상태와 같다.

  오직 돈교법頓敎法만을 전하여
  돈교법頓敎法은 단박 깨치는 가르침의 법입니다. 또 다른 말로 ‘순간 깨침’ ‘몰록 깨침’이라고 하는데, 이 ‘몰록 깨닫는다’ 하는 말이 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선에서는 단박 깨침〔頓悟〕만 인정한다.

  예를 들어 10년~20년 화두를 들거나 봉사하는 수행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설은 것이 익어갑니다. 익어서 종통宗通, 설통說通이 되는데, 그러면 그 익어가는 과정은 점차 닦아가는 점수漸修가 아니고 뭐냐?
  금방 ‘순간 깨침’하는 사람이야 닦는 게 없지만, 순간 깨침 못 하고 육조 혜능 스님만 해도 8개월이 걸리지요. 혜능 스님도 지견知見이 나고 8개월이 지나서야 깨달아요. 그럼 8개월 수행한 것은 점점 닦는 수행이 아니고 뭐냐? 이 문제입니다.
  즉 다시 말해 ‘8개월이 됐든, 10년이 됐든 점점 닦아 깨친 것이니까 점수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주 말씀드렸듯이 ‘손가락과 달’의 비유로 말하면, 달만이 오직 사실이고 손가락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건 허구이고 착각의 세계입니다. 선禪에서는 깨닫는 그 순간부터 현실이고, 진실이고, 사실입니다. 그 달에 가기 위해 닦는 것이나 그 과정은 허구이고, 착각이고, 꿈 속이라는 것입니다. 꿈 깨는 바로 그 순간부터 깨달음의 세계이고, 그게 진실 세계입니다.
  그래서 꿈 깨기 전, 꿈 깨려고 발버둥치다가 꿈 깨는 것은 ‘찰나’ ‘단박’ ‘몰록’이라 합니다. 꿈 깬 그 순간이 찰나간이니까, 몰록 깨닫는 것이죠. 그럼 그 깨닫기까지 노력했던 건 꿈 속에서 노력한 것이니, 그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찰나·몰록·단박이라는 말을 쓰고, 돈법頓法이라 하고, 돈교頓敎라고 합니다.
  육조 스님이 닦은 8개월이라는 세월은 꿈 속에서 한 것이니까, 선에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그냥 몰록 깨쳤다고만 합니다. 육조 스님 스스로도 몰록 깨친 사람이 꿈 깨는 것과 같다고 했지 않습니까? 꿈 깬, 즉 깨달은 후에 다시 무엇을 닦는다 하는 ‘점수漸修’는 육조 스님의 《단경》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에서도 그렇고요.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