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돈오頓悟(2)


이분법적 사고틀을 깨는 데 가장 좋은 것이 화두다

  그리고 그런 공부 방법 중에 제일 좋은 것이 화두話頭 참선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부처님 법[佛法]입니까?”
  “똥 막대기다.”

  우리는 이 ‘똥 막대기’라는데 꽉 막혀 버리거나 말길도 끊어지고 생각의 길도 끊어져 버립니다. 그 끊긴 게 100% 되면 그 자리에서 깨치는데, 그것이 50%는 끊기고 나머지 50%는 아직 남아 있다든지 하면 이런 분들은 못 깨달아요.
  그런 분들은 아직 똥 막대기라는 것에 대해서 모르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스스로 의심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 의심이 점점 깊어가는 것, 또 시간이 오래 지속되어 갈 때, 그걸 삼매三昧라 합니다. 그것이 깊이깊이 들어가 100% 말길이 끊기고 생각의 길이 완전히 끊긴 상태까지 몰고 가서 깨치는 것이 참선參禪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의 바른 길〔正路〕, 말길을 끊고 생각의 길을 끊어 바로 보여주는 분이 선지식善知識입니다.

  그것이 대인연大因緣이고
이 큰 인연이 일대사一大事 인연입니다.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함이니 모든 착한 법이
여기 착한 법〔善法〕은 ‘선하다-악하다’의 그 선법이 아니고 선악을 초월한 선법, 절대선입니다.

  능히 대선지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이런 선지식이 있기 때문에 ‘선-악’을 초월한 절대 선법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선-악’ ‘나-너’ 이렇게 자꾸 나눠 사고하는 것이 병이에요. ‘내가 있다’고 착각해서 그런 거지요.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이라는 것을 알아 버리면 일체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五蘊皆空〕이다”가 정견正見입니다. 우리 존재 원리를 바로 보는 바른 견해입니다. 일상생활에도 이 정견을 잃지 말고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그렇게 수행해 가면 어떤 길도 다 견성해서 도인이 될 수 있고,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가 자유자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바로 보여줄 수 있는 분이 대선지식이니까, 이 선지식으로 인해서 선악을 초월한 일체 선법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경전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 스스로 갖춰져 있다 말할지라도,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경전이 본래 사람의 성품 가운데 다 있어요.

  능히 자기 성품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말로 ‘있다’라든가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자기 성품을 깨달아 보지 못하면 생사심生死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말로 아무리 이해하고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성 자리를 봐야 생사심이 끊어집니다. 생사심이 끊기지 않는 한 계속 마음에 비교하고 갈등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자기 성품을 보라.
본래 갖춰진 자기 성품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선지식을 찾아 가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보라는 말입니다.

  만약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을 의지하지 않는다.
진여본성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그분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습니다. 깨달으면, 선지식이나 부처님이나 우리나 다 같다는 것을 알아 버리면 밖으로 선지식 더 찾을 필요가 없어요.

  만약 선지식을 밖으로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그릇된 것이다.
선지식은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어요. 그런데, 밖으로만 선지식을 찾아 해탈하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선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밖의 선지식과 안의 선지식

  밖에 있는 선지식은 주관과 객관이 끊어진 자리,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자리를 가르쳐주는 분이라 했어요.
  그럼, 안에 있는 선지식은 뭔가요? 진여자성 자리가 안에 있는 선지식입니다. 그 자리도 역시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밖에 있는 선지식은 네 안에 있는 선지식이 이런 것이다 하고 가르쳐주는 분이고, 안에 있는 선지식은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그것을 보는 그 자성 자리를 말합니다. 안의 선지식이라 하니까, 내 마음 속에 사람이 하나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진여자성 자리, 너도 없고 나도 없는 그 자리를 말하지요.
  그러면 밖에 있는 선지식도 그걸 가르쳐줘요. 가르쳐주는 그 선지식의 도움을 받아 안의 선지식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똑같아요. 안에 있는 선지식이나 밖에서 일러준 선지식이나 내용이 똑같습니다. 안의 선지식을 보면 밖에 선지식은 필요 없어집니다.

  자기 마음 안에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는다.
  만약 자기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妄念으로 전도되면,
  삿되고 미혹한 게 뭔가요? ‘내가 있고 너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 전부 삿되고 미혹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깨끗하고 해탈된 본래 마음이 ‘내가 있다’는 착각으로 인하여 망념妄念으로 변한 것입니다.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주어도 스스로 깨치지 못한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고 아무리 가르쳐 주더라도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된 사람은 절대 안의 선지식도 볼 수 없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마땅히 반야로 보고 비춤[觀照]을 일으키라.
  반야가 뭐예요? 나도 너도 없는 그 자리가 반야죠. 너도 나도 없는 그 구름이 걷힌 자리에서 나오는 진공묘유眞空妙有, 그 묘유妙有가 반야입니다. 이 반야로 보면서 비춤을 일으킨다는 것은 안의 선지식이 작동하는 겁니다.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줘서 안의 반야관조라는 선지식이 작용하는 걸 말합니다.

  찰나 간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자기의 진정한 선지식이다.
  망념妄念이 뭡니까? ‘나다-너다’ 하는 그 생각이 망념입니다. 이 망념을 단박에 없애는 사람이 진정한 선지식이다.

착각의 꿈을 깨면 도로 현실의 부처가 된다.

  한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안다.
  망념을 찰나 간에 없애면 그때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부처가 뭔가요? ‘나다-너다’의 양변을 여읜 사람이 부처입니다. 그걸 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전부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이해하는 건 쉬워요. 오히려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착각의 꿈을 깨면 도로 현실의 부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 안의 선지식을 이해하면 정견正見이 바로 섭니다. 정견이 서면 일상생활에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그 정견으로 비춰 보면 해결 안되는 게 없습니다. 다 해결이 됩니다.
  국제적인 어떤 문제도 이걸로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국내에서 정치가들이 싸우고 노사가 싸우고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을 하지만 이 양변을 여읜 자리로 보면 다 해결됩니다. 안 해결되는 게 없어요. 만병통치약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깨비방망이라 합니다. 안 되는 게 없어요.
  부처님 법이 이렇게 위대한 겁니다. 부처님 법이 이렇게 위대하다는 말은 내 존재가 그렇게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내 존재를 깊이 알아 자기를 사랑하고 아껴서 자기도 생활하고 또 자기만 그렇게 하기는 너무 아까우니까, 다른 사람의 존재도 그렇게 존중하여 그런 사람들도 나와 같은 삶을 살도록 생활화, 사회화 하는 데 힘쓰는 것이 원력願力입니다.
  수행자는 원력이 없으면 삿됨에 빠져요. 원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 능력에 따라 열사람이 되면 열 사람에게, 백 사람이 되면 백 사람 상대하고, 천 사람, 만 사람을 상대하는 능력이 되면 그런 능력에 맞춰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죽을 때 확철대오, 견성은 못 했더라도 어떤 한은 안 남기고 갑니다. 이처럼 각자 위치에서 능력껏 열심히 하면 되는 겁니다.
  공부한다고 툴툴 다 털어버리고 산으로 가는 것만이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뒤에 “세간에 있어도 출세간이 되어야 진정한 출가다” 하는 말이 나옵니다. 공간이나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마음가짐이 수행을 하느냐? 안 하느냐? 이게 기준입니다. 무슨 공간이나 시간이 우리를 공부시켜 주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 《육조단경》을 보면서 정말로 시원한 기분이 들어요. 육조 스님 말씀이 정말 맞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꼭 걸망지고 산중에 가야 공부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건 전부 편견이에요. 사실 이걸 깨려고 출가도 하고 수행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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