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돈오頓悟(1)   
 
  선지식아, 내가 홍인 화상 회하에서 한 번 듣고 말끝[言下]에 크게 깨쳐[大悟] 진여본성을 단박에 보았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지혜를 단박에 깨달아 각자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 성품을 단박에 깨닫게[頓悟] 한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한 이는 모름지기 대선지식을 찾아 지도를 받아 자기 성품을 보아라.
  무엇을 이름하여 대선지식이라 하는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이 바른 길을 바로 보여 주는 것임을 아는 분이 대선지식이며, 그것이 대인연大因緣이다.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함이니 모든 착한 법이 능히 대선지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경전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 스스로 갖춰져 있다 말할지라도, 능히 자기 성품을 깨닫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자기 성품을 보라.
  만약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을 의지하지 않는다. 만약 선지식을 밖으로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그릇된 것이다. 자기 마음 안에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는다.
  만약 자기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妄念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주어도 스스로 깨치지 못한다.
  마땅히 반야로 보고 비춤[觀照]을 일으키라. 찰나 간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자기의 진정한 선지식이다. 한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안다.

  선지식아, 내가 홍인 화상 회하에서 한 번 듣고 말끝[言下]에 크게 깨쳐[大悟] 진여본성을 단박에 보았다.

  한번 듣고 언하言下에 깨쳤다고 하는데 실제 그런 건 아니지요. 육조 스님은 출가 전에 시장에서 《금강경》을 듣고 지견知見이 났습니다. 그 전에는 어머니 방을 따뜻하게 해드리고 맛있는 음식 해드리고 춥지 않게 해드리는 것이 효孝라 생각했는데 《금강경》을 듣고 지견이 나니 그보다 더 큰 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그래서 출가를 합니다. 저 멀리 오조 홍인 스님에게 가서 “사람에게 남북이 있어도 마음은 남북이 있습니까?” 하는 말도 하고,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때가 있느냐?” 하는 소리도 했습니다.
  또 육조 스님이 행자생활을 할 때 몸이 가벼워 방아를 찧는데 돌을 짊어지고 하다가 병이 났습니다. 오조 스님이 걱정을 하니까 “내가 없는데 무슨 병이 있습니까?” 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듣고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 기간이 8개월입니다.
  그래서 지견이 나서 그 지견이 점점 깊이 들어가 8개월 동안 공부를 해서 깨친 것이죠. 여기에서는 언하言下, 말끝에 깨쳤다고 하는데 8개월이라는 기간도 소요되었고, 견처見處도 조금씩 조금씩 더 깊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확철대오가 완전한 깨달음이고 돈오다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 종고(1089~1163) 스님도 크게 깨닫기를 여러 번 했고, 적게 깨닫기를 무수히 했다 합니다. 이때 말하는 깨달음은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지요. 마지막 깨닫는 것이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선요》를 지은 고봉 스님도 처음에 깨달아 다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꿈도 안 꾸고, 생각도 없고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을 때 “너의 주인공이 어디 있느냐?” 하는 말에 막혀 6년을 지나서야 확철대오 하셨어요.
  그러나 그 과정은 돈오頓悟가 아니라고 봅니다. 육조 스님도 그랬기 때문에 마지막 《금강경》 들은 그것을 한번 들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 그 중간에 지견知見은 무수히 났습니다. 그런데 그 지견을 육조 스님은 돈오로 안 보셨어요.
  그래서 마지막 《금강경》을 한번 듣고 말끝에 크게 깨달아〔大悟〕 진여본성을 보았다. 이 진여본성眞如本性이란 ‘내가 없다, 실체가 없다, 무아다, 연기 현상이다’ 이렇게 본 그 자리,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하는 이 자리입니다. 그것이 우리는 ‘내가 있다’고 오염된 생각 상태에서 작용하고 있고, 육조 스님은 ‘내가 없다’는 것을 혜안으로 보신 것이죠. 그래서 한번 듣고 언하에 대오하여 진여본성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있다’는 착각 속에서 열심히 정진하여 설사 지견이 났다 하더라도 손가락 속에서, 착각 속에서, 허구 속에서, 꿈속에서 닦았기 때문에 점수漸修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만이 달이고, 현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점수돈오漸修頓悟라고 말하지 않고 돈오頓悟라고 말합니다. 꿈을 깬 진리의 세계 속에는 어디든지 점수漸修란 말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지혜를 단박에 깨달아 각자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 성품을 단박에 깨닫게 한다.
  진여본성이 연기 현상이고 무아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 하는 그 가르침의 법을 가지고 먼 후대까지 유행케 하여 도를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단박에 지혜를 깨달아 ‘내가 없다’는 그 자리에 구름이 걷혀 해가 나온 것, 즉 지혜를 깨달아 각자 스스로 깨끗한 마음을 보는 겁니다. 오염된 마음이 아니고 청정한 마음을 보아 스스로 마음을 깨닫게 한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한 이는 모름지기 대선지식을 찾아 지도를 받아 자기 성품을 보아라.
  스스로 못 깨닫는 사람은 선지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아 견성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이름하여 대선지식이라 하는가?
  큰 선지식이란 어떤 분인가?

최상승법이란, ‘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
  단박 깨치는 법, 돈법頓法, 돈오頓悟를 말합니다. 단박 깨침〔頓悟〕의 내용이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이걸 깨닫는 것이 최상승법입니다.

  바른 길을 바로 보여 주는 것임을 아는 분이 대선지식이다.
  빙 둘러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바로 보여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자성 자리는 누구에게나 두루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못 보고 껍데기만 보아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그 상태에서 ‘나다-너다’, ‘있다-없다’ 이렇게 자꾸 나눠 사고를 합니다.
  이것을 사량분별思量分別이라 합니다. 분별하는 마음으로 뭘 자꾸 알려고 둘로 나눠 사고하는 사량분별, 이것을 깨버리면 진여자성에 돌아가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런 능력을 발휘하려면 우리가 지금까지 둘로 나누는 의식틀을 깨야 합니다.
  이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틀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관과 객관이 초월되어야 하고,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긴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상태를 뭐라고 하느냐? 《금강경》의 “어디에도 머뭄 없는〔應無所住〕”, 유有에도 머물지 않고 무無에도 머물지 않고, 나에도 머물지 않고 너에도 머물지 않는 응무소주된 그 자리가 주관·객관이 초월한 자리고, 사량분별이 끊긴 자리에요.
  우리가 논리적으로 말길을 따라 자꾸 작용하면 사량분별이 안 끊어져요. 그 논리도 초월하고 알음알이도 끊어버리는 방법으로 공부를 가르쳐 주는 분이 선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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