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견성見性(2)

대승에서는 <반야심경>이 정견이다.

  앞에서도 ‘정견正見’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만, 초기불교에서는 정견을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여러 가지 이해하는 것을 정견이라 합니다. 좀 복잡해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세 개가 모두 같은데 대승으로 와서 정견은 단순화시켰다고 보면 됩니다. 대승에서는 <반야심경>을 정견이라고 보면 됩니다. <반야심경>에서도 핵심은 “오온이 모두 공하다(五蘊皆空)”입니다. 이게 정견입니다.
  이 정견을 항상 우리 생활에 적용하여 그렇게 보면서 사고하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굉장한 수행입니다. 그러면 우선 마음이 편해집니다. 해보세요. 해 보면 압니다.

  그러므로 알라, 깨닫지 못하면 곧 부처가 중생이고
깨닫지 못하는 건 뭐예요? ‘내가 없다’는 게 깨닫는 겁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간단합니다. 절대 어렵고 거창한 게 아니에요. ‘내가 있다(有我)’ 하는 사람은 못 깨닫는 거고, ‘내가 없다(無我)’ 하는 사람은 깨닫는 거예요. 본래 ‘나’가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니까 부처가 중생으로 전락하는 겁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곧 중생이 부처가 된다.

  한 생각(一念)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가 된다.
내가 있는 줄 알았는데,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하다(五蘊皆空)”는 것을 알아 ‘아, 내가 본래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중생이 바로 부처가 된다는 겁니다. 중생이 곧 부처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런데 어찌 스스로의 마음을 쫓아 진여본성眞如本性을 단박에 깨닫지 못하는가?
  모든 만법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그 마음을 쫓아 진여본성을 나투지 않는가? 진여본성이 뭡니까? 내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진여본성이라 하니 뭐 거창하게 보이지요? ‘내가 없다’고 아는 그게 진여본성이에요.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원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나의 본래 근원 자리에 있는 그 자성이 청정하다. 왜 청정한가?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차별이 없으니까 그 자리가 청정합니다. 본원 자성 자리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는 또 오염되는 겁니다.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識心見性) 스스로 불도佛道를 이룬다. 즉시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에 돌아간다.

  실제 여러 말로 표현하지만, ‘내가 없다’는 것을 아는 이것 하나뿐이에요.
우리가 한 평생 선방에 앉아 화두 들고 싸움하는 것도 결국은 이것 하나 알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있다’는 그 생각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이게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이 정견이다. 또 <반야심경> 가운데 핵심은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이다(五蘊皆空).” 이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두 다 공이다’ 하는 그 자리에서 해결하고 극복하면서 끝없이 ‘나는 없다’는 자성 청정한 자리로 가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해나가면 출가 수행자의 길에 굉장한 자부심이 생기고, 재가불자의 삶도 재미있고 그렇게 됩니다.
  그게 아니고 밖으로 뭘 자꾸 추구하고 구하면, 구하는 만큼 끝이 없어요. 그러면, 마음에 불만도 생기고, 이것저것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부딪치는 것도 많고, 또 갈등하는 것도 많고,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병들고 늙어 가면 정말로 몸뚱이 하나 처신하는데도 상당히 힘들어져요.
  그래서 우리 삶이 목표인 자성청정 자리로 돌아가는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풍토 속에서는 걸어가기가 참 쉬워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 많은 속에서 혼자 가려고 하면 정말 외롭기도 하고, 또 부딪치는 것도 많아 힘들어요. 목표가 분명한 사람들이 많은 그런 풍토나 분위기 속에서 수행해 가면 수행해 가는 사람들도 참 편하고 가기도 좋습니다. 안 그러면 가다가 걸림돌이 참 많아요.
  수행 풍토를 조금씩 조금씩 개선하면서 함께 더불어 노력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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