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근기根機(3)


돈교頓敎의 돈오돈수와 본래 부처 비유

  성철 스님은 이 돈교頓敎를 돈오돈수頓悟頓修에다 비교를 했지요.
  그런데 이 돈교를 본래성불, 본래 부처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다. 그 자리를 알면 우리가 평등한 걸 알게 되어 상대편도 인정하고 서로 서로 그렇게 차별안하면서 살게 되면, 첫째 그렇게 편안해지고 자유해지고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어떤 순, 역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끄달리거나 지배받지 않고 지혜와 힘이 저절로 나와서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근기가 약한 사람은 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頓敎)을 들으면, 마치 근성이 약한 대지와 초목이 큰 비를 맞으면 모두 스스로 넘어져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근기가 약한 사람도 이와 같다.
  반야 지혜가 있는 점은 근기가 큰 사람과 차별이 없는데, 무슨 까닭에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삿된 견해(邪見)의 장애가 두텁고 또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 또한 크고 적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 근기가 약한 사람이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않고, 오직 자기 마음에서 스스로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정견을 일으키면 번뇌ㆍ진로塵勞의 중생이 모두 다 깨치게 된다.
  큰 바다가 여러 가지 흐르는 물을 받아들여 작은 물과 큰 물이 하나 되어 한 몸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곧 성품을 보면(見性) 밖에도 안에도 머물지 않으며, 또 오고 가는데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걸림이 없나니,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경>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다.

  근기가 약한 사람은 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頓敎)을 들으면,
이 돈교頓敎는 단박 깨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인데, 그 존재 원리의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것은 착각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착각은 누구나 깰 수 있습니다. 간혹, 깨쳤는데 다시 희미해졌다는 말을 듣는데 그건 완전히 깬 건 아니지요. 착각을 완전히 딱 깨버리면 다시 착각할 건 없지요. 이것을 돈교법頓敎法이라 합니다.

  마치 근성이 약한 대지와 초목이 만약 큰 비를 맞으면 모두 스스로 넘어져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근기가 약한 사람도 이와 같다.
  그러니까 근기가 약한 분은 이 단박 깨치는 법을 들으면 뿌리가 약한 풀과 나무가 큰 비를 맞으면 뿌리가 다 뽑혀서 말라죽고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반야 지혜는 근기가 큰 사람과 차별이 없는데, 무슨 까닭에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근기가 약한 사람이나 큰 사람이나 반야 지혜가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앞에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존재 원리는 똑같아요. 다 보편되어 있어요.
그러면 반야 지혜는 조금도 차별이 없는데 왜 법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까요?

  삿된 견해(邪見)의 장애가 두텁고 또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이 삿된 견해가 뭔가요?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거예요. 삿되다고 희한한 뭐가 아닙니다.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장애가 두터워 바로 깨치지 못하는 겁니다. 또, 이런 저런 망상하는 번뇌의 뿌리는 삿된 견해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삿된 견해의 장애나 번뇌의 뿌리는 어디에서 올까요? ‘내가 있다’고 하는 데서 옵니다. 간단합니다. 연기 현상이기 때문에 내가 실체가 없다, 공이다, 이렇게 보면, 삿된 견해의 장애도 없어져 버리고, 번뇌의 뿌리도 뽑혀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선사 스님들이 많이 얘기하는 비유죠. 구름에 가려 반야의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나오지 못하는 것은 ‘있다-없다’ ‘나다-너다’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그 집착만 없애면 구름이 걷히면서 반야의 지혜도 나오고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적음이 없으나
지혜가 누구는 크고, 누구는 작고 그런 게 아니에요. 부처님이나 우리나 똑같아요. 반야의 지혜는 손톱만큼도 안 틀려요. 다만 구름에 덮여 있을 뿐이에요. 한 분은 구름이 덮여 있고, 한 분은 구름이 안 덮여 있어, 안 덮여 있는 분은 부처님이라고 하고, 덮여 있는 분은 중생이라고 하는 것뿐입니다.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
스스로 ‘내가 있다’ 이렇게 집착하면, 그 다음부터 소설을 씁니다.
어떻게 쓰느냐? 밖으로 닦아요. 자기 안에 ‘있다-없다’ 이것을 없애는 공부를 안 하고 자꾸 밖으로 뭘 닦고 구해요.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행복의 조건을 밖으로 찾습니다. 밖으로 찾는 것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이니까 물질을 찾게 됩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기심이 자연 그렇게 만듭니다. 그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수행하면서 밖으로 찾는다는 것은 부처님이 내 밖에 있다고 생각해서 부처님 찾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꿈에 헛것이 보이면 부처님이 감응感應 했다고 야단이에요. 이런 분들이 밖으로 찾는 거예요.
  밖으로 찾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마음이 미혹한 사람,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밖으로 찾으면서 부처님을 찾기 때문에 자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님도 찾고 행복해질 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본성, 이 자리는 ‘나-너’가 없다는 거예요. 이 본성 자리를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 합니다. 또 무아無我라 하기도 하고, 그래서 본성 자리를 깨닫게 되면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된다. 또 그리고 비교하지 않게 된다. 또 비교 안 하니까 비교하는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지배받지도 않고 자유자재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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