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반야般若(3)
 

탐ㆍ진ㆍ치 삼독三毒이 변해 계정혜가 된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에서 삼독三毒을 변하여 계정혜戒定慧로 삼았다.
  계정혜戒定慧가 분리된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구름이 걷히면, 정定이죠. 그 다음에 밝은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나와서 그 상태에서 일상생활하고 있으면 그게 계戒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개가 하나예요.
우리나라에 지금 선사禪師, 강사講師, 율사律師가 따로 있어 역할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율사가 선사고, 선사가 율사고, 강사가 선사고, 선사가 강사고 다 같아야 합니다.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삼독三毒이 변해서’ 할 때도 삼독을 없애고 계정혜가 되는 게 아니고, 삼독 그것이 변해가지고 계정혜가 되는 거예요. 삼독 그것이 나쁜 게 아니고 세탁만 하면 돼요. 오물이 조금 묻은 게 문제에요. 오물 세탁만 해 버리면 계정혜가 되는 겁니다. 삼독이 절대 나쁜 게 아닙니다.
사람도 나쁜 사람이 없듯이 우리 마음도 나쁜 마음이 없습니다. 좋은 마음, 나쁜 마음이 따로 없어요. 그 좋은 마음, 나쁜 마음 두 개 세탁해 버리면 참된 좋은 마음이 거기에서 나와요. 그게 부처라 합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수행이다.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 사천 지혜를 쫓으니, 어째서 그런가?
앞에서 말한 정혜가 같고, 우리가 본래 성불에 있는 그 자리는 팔만사천 지혜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둘이 똑같다는 거예요. 하나는 세탁되어 있고 하나는 세탁되어 있지 않은 것뿐입니다.
  우리가 옷에 흙이 묻으면 세탁하고 입지요? 그 흙 묻은 옷을 세탁하고 나면 그 옷이 다른 옷입니까? 흙만 씻겨 나간 그 옷이잖아요. 또, 겨울옷, 여름옷이 있다 할 때 그런 옷에 흙 묻은 것을 세탁한다고 해서 겨울옷이 여름옷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 옷 그대로에요.
  그래서 우리가 번뇌와 지혜를 둘로 보면 안 됩니다.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하나는 세탁되어 있고, 하나는 세탁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것도 세탁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번뇌를 싫어하기보다 사랑할 줄 알게 되면 오히려 세탁을 잘 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절대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렇게 가르지 않는 것이 수행자에게는 중요합니다.

  세상에 팔만사천 진로塵勞가 있기 때문이니,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있는 그 반야는 자성自性을 여의지 않는다. 형상만 보고 자꾸 집착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 형상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무아라고 보는 그 자리가 자성이거든요. 이 자성은 항상 있어요. 우리도 듣고 보고 하는 이것이 자성과 항상 같이 하고 있는데 그걸 못 보고 있기 때문에 형상에 집착해가지고 때가 묻어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는 걸 알게 되면,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고 항상 세탁된 그 상태에서 작용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법을 깨달은 자는 곧 무념無念이다.
무념無念은 뭐냐? 무념은 자성 자리를 아는 것, 그게 무념입니다.

  기억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어서 속이고 거짓됨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다.
  우리가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는데 그 현상이 연기이고, 실체가 없고, 무아라는 걸 알면, 그 자체가 자성을 여의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념無念이 되고, 기억하는 것도 없고(無憶), 집착하는 것도 없어(無着) 또 속이고 망령된 것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 자리가 진여의 성품(眞如性)입니다. 이 진여의 성품으로 우리가 작용하고 행동하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여기 진여의 성품이 곧 지혜입니다.

  지혜로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룬다.”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취하면 집착이지요. 또 버리면 무無에 떨어지지요.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실제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가 양변을 여의어 그것을 쓰면,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면서 씁니다. 이 양변을 여의는 것이 그래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양변을 여의려면, “모든 것이 연기 현상이고, 연기 현상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무아無我다.” 이것을 우리는 항상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요禪要》 이야기를 앞에서도 했지만 “공부하는 사람은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 마음으로 일으켰던 모든 것을 타방 세계에 던져 버리고 공부해라” 바로 이 얘기예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역경계逆境界, 순경계順境界를 항상 만납니다. 순경계는 잘 넘어갑니다. 좋은 거니까. 그런데 역경계를 만나면 하루나 이틀, 심하게 가는 사람은 한 일 년도 갑니다. 마음에 담아두고 끙끙 앓고 고민하거든요. 그럴 때만이라도 “이것은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다, 연기 현상이다.” 이렇게 생각을 반복하면서 그 시간도 단축하고, 횟수도 좀 줄이고, 그러면서 공부할 마음을 내고 하면 훨씬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른데, A라는 사람은 어떤 현상을 보고 하루쯤 속상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B라는 사람은 한 달쯤 속상해 하는 사람이 있고, 또 C라는 사람은 1년쯤 속상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간다는 사람도 있지요? 그건 각자 사람이 달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있다’는 집착심이 그만큼 강하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남들보다 자신이 역경계를 쉽게 못 넘기는 분이 있다면, 마음 속으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나’에 집착이 강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 훈련을 열심히 하십시오. 처음에는 ‘실체가 없다’ ‘공이다’ 하면 정말로 무상하고, 허망하고, 재미도 없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게 조금씩 조금씩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진공眞空이 되어 간다’고 하고, 그 진공되어 가는 과정이 조금 깊어지면 거기에서는 깊어진 것만큼 ‘묘유妙有’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지혜가 나와요. 단순하게 허망하고 재미 없겠다가 아니라 해결하는 지혜의 방법이 나옵니다. 이 말입니다.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