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반야般若(2)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없다. 사람을 차별하고 미워하면 안된다.

  이것을 또 하나 비유하면,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나쁜 사람일지라도 죄를 일으키고 극악무도한 행위를 일으키는 그 본래 자리를 보면,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성품이 굉장히 착하고 좋은 일만 하고 사는 사람도 역시 자기 성품을 보면 영원히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형상만 보지 말고 그 본질을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앙굴마라도 그렇게 극악무도해도 부처님 말씀을 듣고 굉장히 착해진 사람이에요.
  선문禪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앙굴마라가 하루는 탁발을 나갔는데, 어느 집에 가니 임산부가 애를 낳는데 굉장히 난산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시아버지 되는 분이 앙굴마라한테 “당신은 수도를 많이 한 스님이니까 우리 며느리가 순산하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해요. “나는 그런 거 모릅니다” 해도, 막무가내로 부탁을 하니까, 결국, “부처님한테 물어보고 와서 해 주겠다” 하고는 부처님께 와서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부처님 법을 얻은 후로는 사람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살의도 품지 않았다’ 그 말만 가서 해라. 그러면 애기가 금방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 그 말을 하니, 애기가 태어났습니다.
  세상 삶이 괴롭고 고통스러움을 애 낳을 때의 산통에다 비교한 말이고, 또, 양변을 여읜 그 자리를 그렇게 표현을 해서 애기가 순산했다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얻었다는 비교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파도는 무조건 나쁘고, 잔잔한 물은 좋다,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극악무도한 사람이라도 자기 성품을 알면 굉장히 착한 사람이 됩니다. 실제 사람이 나빠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자기 존재 원리를 몰라 착각에 빠져 그런 극악무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미워하면 안됩니다. 부처님처럼 연민을 해야 합니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실천한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만 합니다. 반야니, 뭐니, 입으로만 말을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말로 하지 않고 마음으로 실천을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때 망상(妄)이 있으면, 그 있는 망상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만약 행하면 곧 진실이 있다고 말한다.
  이 망(妄)이 다른 게 아니라 ‘있다-없다’, ‘나다-너다’ 양변에 빠진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말은 짚고 가야 합니다. 막연히 망이라 하는 추상어가 절대 아닙니다. 양변에 집착하면 온갖 망상이 다 나오는 거예요. 그건 착각입니다.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아 생각 생각마다 마음으로 실천하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이 법을 깨달은 이는 반야법般若法을 깨친 것이며, 또 반야행般若行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 생각(一念)으로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다.
  여기에도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지면 그 자체가 근원이 되어 온갖 망상을 피우는데,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착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 생각을 마음으로 닦으면 그것이 이 법을 깨닫는 것이고 반야행을 닦는 것입니다.

  선지식아, 곧 번뇌가 지혜(菩提)이니,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착각에 빠져 어디에 집착하고, 갈등, 대립하고, 망상 피우고 하는데 그게 ‘있다’는 그 생각에서 다 나오는 것이지, 따로 어디에 있어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그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지혜(菩提)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아무리 흙탕물이라도 그 흙탕물의 습기를 알게 되면 물인 것을 알듯이, 그렇게 우리의 번뇌가 없어져 지혜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번뇌 그 자체가 깨달음으로 변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 번뇌란 착각에 빠져 형상만 보고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고, 이 보리란 그 형상의 본질, ‘있다-없다’를 초월한 그 자리, 연기되어 있고, 연기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으니까 공이고, 무아라고 아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입니다. 번뇌와 보리 이게 둘이 아니에요. 그놈이 그놈이에요. 그놈이 착각해서 보는 것, 착각에서 깨어나 보는 것이니 똑같은 놈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번뇌는 ‘나’라는데 집착해서 형상만 보는 것이고, 지혜(菩提)는 ‘나’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무아라고 생각하는 그것이라는 말입니다.

  앞생각(前念)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이고, 뒷생각(後念)에 깨달으면 곧 부처다.
  앞생각은 번뇌를 말합니다. 번뇌에 미혹하면 범부고, 그것이 실체가 없고 무아고 공이라고 아는 게 뒷생각, 즉 깨달음이고, 부처입니다.

  선지식아, 마하반야바라밀은
마하는 크고, 반야는 ‘나다-너다’는 양변을 여읜 그 자리이고, 그 여읜 자리에서 일상생활하는 것을 바라밀이라 합니다.
  마하반야, 즉 양변을 여읜 그 자리에서 일상생활을 하게 되면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더라도 지금 우리가 사는 것과 전혀 다른 매일매일 좋은 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장 귀중한 것이고, 가장 높은 것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이것도 천하고, 낮고, 제일 꼴찌 가는 것과 대비되는 최고, 최존, 최상, 제일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이렇게 보편되어 있기 때문에 ‘천하다-귀하다’는 양변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가장 귀중하고, 가장 높은 것은 ‘높다-낮다’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최상이고, 제일도 ‘제이-제일’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제일입니다. 이것도 차별심으로 보게 되면 또 착각에 빠집니다.
  그 자리는 머무름도 아니고, 머무르면 집착이죠. 또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에요.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본래 존재해 있기 때문에 간다고 해도 안 맞고, 온다고 해도 안 맞습니다.
  그럼, 이게 어디에 있는 것이냐?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에요. 이 글을 보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가 본래 그 자리이고, 그래서 그 자리가 마하반야바라밀이고, 그 자리가 가장 존귀한 자리이고, 최상이고, 제일가는 그런 자리에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굉장히 가치 있는 존재인데, 그걸 모르니까 굉장히 싸게 보고 낮게 알아 값있는 행동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에서 나와
과거, 현재, 미래 세상의 모든 부처님도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으며, 가장 귀중하고, 가장 높으며, 제일의 이 자리에서 나왔지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이 자리는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바로 그 자리에요. 모든 부처님이 우리와 손톱만큼도 다른 게 없고 똑같아요. 그분들은 그 자성 자리를 보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이름 붙이고, 우리는 그 자성 자리를 못보고 형상만 보고 있기 때문에 ‘중생’이라 이름 붙일 뿐입니다.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러
그 자리를 아는 것이 큰 지혜입니다. 저 언덕에 이르러, 양변을 여의면 저 언덕은 저절로 이루어져요. 이 언덕-저 언덕도 없습니다.

  오온五蘊의 번뇌와 진로塵勞를 타파하는 것이니, 가장 귀중하고 가장 높으며 제일이다.
  그 자리에 이르러 오온의 번뇌와 진로塵勞를 다시 타파하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이른 그 자체가 오온, 번뇌, 진로를 타파하는 것이고, 제일 귀하고 제일 높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자꾸 강조합니다. ‘가장 귀중하고, 가장 높으며, 제일이다.’ 《금강경》에서도 이것처럼 계속 강조하고 있지요?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 …… ’ 하며 강조하지요. 처음 《금강경》을 볼 때 ‘중국 사람도 풍이 센데, 인도 사람도 굉장히 풍이 세구나!’ 이렇게 느꼈는데 지금은 ‘부처님 법은 정말로 그런 말로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이 지구상의 많은 인류가 부처님 법을 체험은 못 하고 이해만 하더라도, 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은 없어질 것입니다. 남북 이데올로기 문제도 다 해결되고, 또 사회의 여러 가지 부정, 비리, 대립, 갈등 문제들도 해결 안 되는 게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반야 지혜입니다. 우리도 이 반야 지혜가 없는 게 아닙니다. 다 갖춰져 있습니다. 바로 이 듣고 보고 하는 것이 지혜인데 다만, 그것이 세탁기 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집착해서 듣고, 이기심으로 듣고, 이해관계 따지고 듣고 하니까, 반야 지혜가 개발이 안돼요.
  그래서 양변을 여읜 그 자리, 무아라는 그 자리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세탁해서 보는 그 기능이 발휘되어서 거기에서 바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다(最上)고 찬탄하여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부처를 이루어 가는 것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오고 가는 것도 없나니
  그 자리에 있어요. 그 자리에 있다고 하니까 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절대 머물러 있지 않아요. 그래서 가는 것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오고 가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정定과 혜慧가 같아서 일체법에 물들지 않는다.
이것을 ‘적적성성寂寂惺惺’, ‘성성적적惺惺寂寂’ 이렇게 말하지요. 정定은 양변을 여읜 것, ‘나다-너다’, ‘있다-없다’를 여읜 것이고, 그렇게 여의게 되면 구름이 걷힌 것과 같고, 그 여읜 자리에 해가 나와서 그 허공과 해가 하나 되어 잘 비춰져 있는 그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그것을 ‘정혜가 같다’고 합니다.
정혜가 같게 되면 ‘나다-너다’, ‘있다-없다’ 등 일체에 물들지 않습니다.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