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네 가지 원(四願)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에게 귀의해 마쳤으니, 선지식으로 하여금 네 가지 넓고 큰 원(四弘大願)을 발하리라.
선지식아, 다 함께 혜능을 따라 말하라.

  가없는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가없는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가없는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 다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이상 세 번 합창>

  선지식아, 가없는 중생을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선지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의 중생을 각각 자기 성품(自性)이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다.
  그럼 자기 성품으로 스스로를 제도濟度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邪見)와 번뇌, 그리고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정견正見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이미 정견正見인 반야의 지혜를 깨쳐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면 중생 스스로가 제도하는 것이다. 삿된 것이 오면 바름(正)으로 제도濟度하고, 미혹한 것이 오면 깨달음으로 제도하고, 또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善)으로서 제도하며,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니, 이와 같이 제도濟度함을 진실한 제도라 한다.

  가없는 번뇌를 다 끊기를 서원誓願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한 것을 없앰이요.
  가없는 법문을 다 배우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위없는 정법(無上正法)을 배움이요,
  위없는 불도(無上佛道)를 다 이루기를 서원하는 것은 항상 마음 낮추는 행동(下心)을 하여 일체를 공경하며 어리석은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를 내어 미망迷妄을 없애는 것이다.
  곧 스스로 깨달아 불도를 이루어 서원력을 행함이다.

  선지식아, 가없는 중생을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선지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다.
  가없는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고 원력을 세우지만 실제 혜능이 선지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안의 선지식을 보라!

  우리는 요즘 ‘선지식이 없다’고 자꾸 얘기하는데요. 바깥에 아무리 선지식이 많아도 내 안의 선지식을 발견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밖에 선지식이 설사 없더라도 내 안에 선지식을 발견하게 되면, 얼마든지 견성성불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내 안의 선지식은 뭡니까?
  양변을 여의는 것이 내 안의 선지식입니다. 내 마음에 선지식이 있다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양변을 여의면 그 자리가 바로 선지식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안의 선지식을 봐야 합니다. 밖에 있는 선지식을 천일千日, 만일萬日 보더라도 그것으로는 제도가 안 됩니다. 밖에 있는 선지식은 내 안의 선지식을 보는데 도움을 주는 분입니다.
  그래서 혜능이 선지식을 제도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혜능스님이 우리를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성품이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다.

  마음 속의 중생을 각각 자기 성품(自性)이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없다, 나다-너다, 좋다-나쁘다는 그 중생의 마음을 초월한 그 자리를 보는 것이 바로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마음 속에 있는 양변을 초월한 자리를 보는 것이지, 육조 조계혜능 스님이 제도해주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했듯이 밖에 선지식이 아무리 삼대같이 많아도 자기 선지식을 봐야 제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자기 성품으로 스스로를 제도濟度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邪見)와 번뇌, 그리고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정견正見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삿된 견해와 번뇌도 양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삿된 견해와 번뇌, 어리석음과 미망 그 속에 깨달음의 성품이 있고, 그 속에 자성自性이 있어요.
  그 속의 자성自性은 뭡니까?
삿된 견해(邪見)을 일으키고, 번뇌를 일으키고, 어리석음(愚癡)과 미망迷妄하는 바로 그 놈이 연기현상인 줄 알면 그 속의 깨달음의 성품(覺性)을 보는 겁니다. 간단해요. 정말 쉽습니다.
  잘 보세요. 삿된 견해(邪見)가 뭡니까? 삿된 견해는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겁니다. 삿된 견해가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상견常見, 없다에 집착하는 것을 단견斷見이라 하는데, 이것이 모두 삿된 견해(邪見)입니다.
  삿된 견해와 번뇌, 그리고 어리석음과 미망迷妄이 연기緣起 현상이고 이게 우리 생각입니다. 지금 늘상 일으키고 있는 생각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생각이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스스로 본래 깨달음의 성품(覺性)을 보는 겁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지식으로 이해하는 한계

  그런데 우리는 알기는 아는데 왜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안 됩니까?
그것은 지식知識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지식을 비우고, 양변을 뛰어넘은 그 자리에서 보게 되면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되지요. 우리는 자꾸 지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래서 지식으로 받아들여도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여 생활화하고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수행 가운데 화두, 염불, 봉사 등등을 통해서 자기를 향상시켜 가는 것이 출가 수행자의 본래 목적이자 모든 불자의 근본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못 가도 좋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개, 걸, 윷 다 좋습니다. 꼭 모만 좋은 게 아닙니다. 가는 만큼 좋고 즐겁고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삿된 견해와 번뇌, 어리석음과 미망 속에 깨달음의 성품(覺性)이 있습니다. 이 깨달음의 성품을 깨치려면 삿된 견해와 번뇌, 어리석음과 미망 그 자체가 연기인 줄 알고 실체가 없는 줄 아는 것이 깨달음의 성품을 보는 겁니다.

  이미 정견正見인 반야의 지혜를 깨쳐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면 중생 스스로가 제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제도하는 겁니다.

  삿된 것이 오면 바름(正)으로 제도濟度하고, 미혹한 것이 오면 깨달음으로 제도하고, 또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善)으로서 제도하며,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니, 이와 같이 제도濟度함을 진실한 제도라 한다.
  번뇌를 다 끊기를 서원誓願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한 것을 없앰이요.
  스스로 마음의 허망함은 왜 일어날까요? 나다-너다, 있다-없다는 양변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법문을 다 배우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위없는 정법(無上正法)을 배움이요,
  위없는 정법(無上正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양변을 여의면 그 자체가 정법이고, 그 자체가 더 이상 비교할 게 없는 정법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라는 겁니다. 부처가 ‘중생이다-부처다’를 뛰어 넘었기 때문에 부처입니다.  제일第一은 왜 제일인가? 제일이 제일이 아니기 때문에 제일이라 해요. 제일과 최하를 뛰어넘어버리면 전부 다 제일이 되어 있기 때문에 제일이고, 부처가 부처 아닌 것이 부처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부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비교하는 게 없어져요. 이런 법은 부처님 법 말고는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이걸 만든 게 아닙니다. 당신도 발견하신 겁니다. 우리 존재 원리를 그렇게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부처, 마음, 중생이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란 부처가 아니어서 부처’ 라고 하면 좋다-나쁘다, 높다-낮다 이렇게 비교하면서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닙니다. 부처가 부처 아닌 줄 알면 그게 진짜 부처입니다. 그 부처는 마음도 중생도 부처도 차별이 없는 평등한 부처님입니다.

  위없는 불도(無上佛道)를 다 이루기를 서원하는 것은 항상 마음 낮추는 행동(下心)을 하여 일체를 공경하며 어리석은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를 내어 미망迷妄을 없애는 것이다.
  위없는 불도(無上佛道)를 성취하는 것은 항상 하심下心하는 겁니다.

하심下心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여기에서 하심하라 한다고,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이 하심下心은 뭐냐? 우리가 중생이다-부처다를 초월한 그 자리가 하심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없는 것인 줄 아는 것이 하심이에요.
  그런 하심은 당당합니다. 교만하지 않아요. 당당하면서도 겸손하고 절대 비굴하지 않아요. 이게 진짜 하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심하라고 하면 비굴한 것처럼 이해합니다. 또 당당하라고 하니까 교만하지요. 이건 아닙니다. 당당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비굴하지 않는 이런 분이 하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은 항상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 아니라 항상 부처님으로 보는 거예요. 살인한 사람도 부처님으로 보고, 노동자나 기업가도 부처님으로 보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는 겁니다. 똥 푸는 사람도 부처님으로 보고 대통령도 똑같이 부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어요.

  곧 스스로 깨달아 불도를 이루어 서원력을 행함이다.
스스로 깨달으면 우리는 불도를 이루고 있는 거지요. 또 이룬 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니까 미망에 빠져 자기 학대하고 남도 학대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을 자기 본래 마음으로 돌이켜 함께 잘 살게 해줘야 하겠다 하는 그런 마음 내는 것이 자비심이고 원력입니다. 이것은 깨달으면 저절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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