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삼신三身(3)
 

화두의 의미

  그래서 선사들이 화두를 ‘똥막대기’니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하는 게 의미가 있어요. 그냥 하는 게 아닙니다. ‘똥막대기’니 ‘정전백수자’하면 생각의 길도 딱 끊어버리고 말길도 끊어버리잖아요. 끊으면 어떻게 됩니까? 작용 안 하잖아요. 그때 바로 보라, 바로 깨쳐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렇게 못 보면, 못 깨치면 또 거기에서 말길이 끊기고 생각의 길이 끊긴 그놈을 붙잡고 계속 “어째서 똥 막대기라고 했을까?” 말길이 끊기고 생각의 길이 끊긴 그것을 잡고 점점 깊이 의심해 들어갑니다. 깊이 들어가 그 의심이 100% 성숙이 될 때 주관ㆍ객관이 끊겨 그 자리에서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수수께끼 같고, 쓸데없는 말을 하느냐?’ 하고 얘기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에요. 거기에 깊은 의미가 있어요. 깊은 의미 뿐 아니라 굉장한 자비심도 있어요.
  예를 들어 향엄(香嚴, ?~898) 스님 같은 이는 위산(潙山, 771~853) 스님한테 자꾸 말로 가르쳐 달라고 해요. 위산 스님이 안 일러줘요. “내가 일러주는 건 쉬운데 나중에 네가 나를 굉장히 원망할 거다. 그래서 내가 안 일러 준다.” 그래서 결국 향엄 스님이 깨치고 나서 “스님, 법보다도 안 일러준 그것이 너무나 고맙습니다. 만일에 그때 스님께서 일러줬다면 오늘 내가 이 자성을 어떻게 봤겠습니까? 안 일러준 그것이 고맙습니다.” 하고 멀리 위산 스님이 계신 쪽을 향해 절을 합니다. 화두라는 것이 그런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지옥이 되고, 선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천당이 되며, 독과 해침은 변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하여 윗세계(上界)가 되고,
  여기에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공적영지空寂靈智한 자리를 체험하고 깨달으면 절대 이렇게 안 됩니다. 이것은 못 깨닫는 사람이 하는 얘기예요. 공적영지한 자리를 체험 못하고 상응이 안 되었을 때는 이렇게 되지만, 상응 되어 깨닫게 되면 이렇게 안됩니다.
  윗세계(上界)는 하늘나라도 아니고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환경 좋은 곳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끄달리거나 지배받지 않는 곳으로 보면 됩니다.

  또 어리석음은 변해서 하방下方이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은바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 못한다.
  어리석고 못된 사람을 “짐승 같은 놈아” 그러지요. 이게 하방입니다. 자성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데 깨치게 되면 이렇게는 안변하지요. 오로지 자비와 지혜로만 작용하는데, 미혹한 사람은 왜 이렇게 작용하는지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한 생각이 선하면 지혜가 생하니, 이것을 자성화신自性化身이라 한다.
이 지혜가 뭐냐? 양변을 여읜 자리가 지혜입니다. 지혜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양변에 집착하면 어리석은 것이고, 양변을 여읜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상근기, 하근기가 따로 없습니다. 이 말을 믿고 양변을 여의는 사람은 대장부고, 상근기이며, 이 말을 보고도 믿지 않고 양변에서 항상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졸장부이고 하근기입니다.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상근기, 하근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견해입니다.

  원만한 보신불報身佛이란 무엇인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는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선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 한다.
  지금 한 깜깜한 방이 있다고 가정할 때 불을 하나만 켜도 방이 환하지요. 그럼 불 켜는 것은 뭐냐? 양변을 여읜 것,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불 켜는 거예요.
  그런데 양변, 즉 ‘너다-나다’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깜깜한 거예요. 간단해요. 복잡한 게 아니에요. 이 간단한 걸 우리는 못하고 있어요. 이해도 못 하고 또 그걸 받아들이지도 못하니까, 남과 시비 갈등하며 괴롭게 사는 겁니다.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선함을 물리쳐 그치고, 한 생각의 선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없앤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선함을 보신불報身佛이라 한다.
  여기에 선한 과보할 때의 선善은 선악을 초월한 과보입니다. 한 생각 선한 과보는 도리어 천년의 악을 멸하나니 이것은 영원히 멸해 버립니다. 다시는 어두움으로 안 오고 악으로도 안 옵니다. 절대 선입니다.
  절대 선善이 운문스님이 얘기한 매일 매일 좋은 날이고, 하는 일마다 다 선한 일입니다. 이게 또 그렇게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한번 하려면 할까 말까 고민하잖아요. 또 하면 내가 손해 보는 게 아닌가, 그러는데 이것은 그렇게 쉽다는 거예요.

  법신法身을 쫓아 생각함이 곧 화신化身이고,
법신에서 작용하는 것은 화신입니다.

  생각 생각이 선한 것이 보신報身이다.
생각 생각이 선하다는 것은 무엇이냐? 생각 생각이 선했다가 악했다가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 생각이 영원히 선한 것, 양변을 여읜 것입니다. 이것이 보신입니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는 것을 곧 귀의歸依라 한다.
귀의라는 것은 양변을 여읜 자리가 바로 귀의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나는 중생이니 부처님한테 의지해서 귀의하겠다’ 이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는 것을 귀의歸依라 합니다.

  가죽과 살은 색신色身이며 집이라 귀의할 곳이 아니다.
이것도 문제입니다. 가죽과 살이 색신色身이라 했는데 가죽과 살이 연기 현상이지요. 껍데기도 있고 고체도 있고, 또 액체도 있고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다 있어요. 이렇게 여러 개가 모여서 가죽과 살이 되었어요. 여러 개가 모여 되었기 때문에 그 가죽과 살에는 실체가 없어요. 공이에요. 그런데 여기 집이다, 색신이다, 이것도 사실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잘못을 따지려 하는 게 아니니까 이 정도만 얘기하고 넘어 갑니다.
  요즘은 우리 이 가죽과 살의 색신이 60조의 세포 덩어리라 합니다. 60조 세포가 모이면 어느 세포를 가지고 ‘나’라 할 것인가? ‘나’라는 것이 실체가 없습니다. 다만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겉모양을 보고 자꾸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만 세 몸(三身)을 깨치면 곧 대의大意를 아는 것이다.
세 몸을 깨닫게 되면 대의를 안다. 세 몸을 안다는 것은 청정 법신 자리, 거기에는 악도 없고 선도 없고,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그 자리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세 몸(三身)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 몸(三身)을 깨달으면 대의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 존재원리를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원리를 알게 되면 지금과 같은 이런 삶은 억울해서 못 삽니다.


세 몸(三身)에 대한 설명

  청정 법신法身이란, 선도 없고 악도 없고, 너도 없고 나도 없는 그 자리를 말하며, 그 자리에서 작용 일어나는 것을 화신化身이라 합니다. 이 화신불, 청정법신불을 못 깨치면 악이 화하면 지옥이 되고, 또 선이 화해서 천당도 되고, 독과 해침이 화해서 축생이 된다고 했어요.
  우리가 이 양변을 뛰어넘어 실체가 없고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아 작용하는 게 있지요. 양변을 뛰어넘어 실체가 없고 공이다 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절대 선으로 간다 했어요. 그 뒷생각(後念)이 악으로 안 가고 절대 선에서 계속 가는 그것이 보신報身입니다.
  이 보신報身은 수행해서 얻어지는 부처님, 여기에서는 당래 원만보신불이라고 했는데 미륵불, 아미타불 같은 분을 보신불이라 합니다. 수행해서 얻어진 그 자리를 수용한 분을 보신불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화신불은 현재 절대 선에서 활동하는 분이라면, 보신불은 방금 얘기했던 뒷생각이 선한 분이니 당래 미륵불로 봅니다.

  실제 큰 차이가 없지만,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눴는데, 임제스님 같은 분은 지금 우리 마음에서 나다-너다 없는 그 청정한 것이 부처님이고, 심광명心光明, 거울로 말하면 유리가 있는데 유리에 비추는 성격이 있지요, 이걸 법으로 보는데 심광명心光明이 법이요, 또 처처무애處處無碍가 승僧이다, 이렇게 봐요.
  그런 것이 우리 존재에 여러 개 있는 게 아니에요. 전부 같은 거예요. 같은데 그걸 전부 말을 바꿔 이해시키다 보니, 여러 개 있는 것 같지만, 불법승佛法僧이나 청정법신, 보신, 화신이나 전부 다 같습니다.

  그리고 선종禪宗에서는 이것을 살활殺活, 살활동시殺活同時라 하기도 하고, 교종敎宗에서는 체용體用, 체용동시體用同時, 기용제시機用提示 이렇게 말하는데 전부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명암明暗이라 하는 것도 같은 소리고, 또 이사理事라 하는 것도 같은 소리입니다.
  그래서 임제스님 같은 분이 말씀하신 사료간四料簡 같은 것도 전부 이걸 얘기하고 있고, 또 <화엄경>에서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하는 것도 이 말과 모두 같은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울 때 이걸 회통해서 배웠으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가르치는 분들이 따로 따로 가르쳐줬어요. 그래서 따로 따로 있는 것 같이 알고 있어요. 이걸 하나로 가르쳐주어야 회통되어 자유자재하기가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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