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삼신三身(1)

  선지식아, 모두 마땅히 스스로의 몸으로 무상계無相戒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세 몸의 부처(三身佛)을 보게 하리라.

  ‘나의 색신色身의 청정 법신불法身佛에게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에게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 보신불報身佛에게 귀의합니다.’

하라(이상 세 번 따라 부름).

  색신色身은 집이므로 가히 돌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三身)은 자기의 법성法性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 여래如來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三性佛)를 보지 못하니라.
  선지식아 들어라. 선지식에게 말하여 선지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색신 속에 있는 법성法性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라.

  선지식아, 모두 마땅히 스스로의 몸으로 무상계無相戒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혜능스님이 먼저 선창하고 대중에게 따라 하라고 하십니다.

  선지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세 몸의 부처(三身佛)을 보게 하리라.
나의 색신色身의 청정 법신불法身佛에게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에게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 보신불報身佛에게 귀의합니다’
하라(이상 세 번 따라 부름).

  <반야심경>에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이다” 했지요. 색色은 모든 형상 지어진 것을 말하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우리 정신 작용을 말합니다. 색과 수ㆍ상ㆍ행ㆍ식이 모두 법성으로부터 일어난 연기 현상이기 때문에 공空이고, 무아無我입니다.
  그래서 색신色身이 법신法身이고, 법신이 색신입니다.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는 바로 이것이 법신불이고, 보신불이고, 화신불입니다. 이것 말고 따로 삼신불三身佛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색신色身은 집이므로 가히 돌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三身)은 자기의 법성法性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 여래如來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三性佛)를 보지 못하니라.

  이 세 몸(三身)은 법성 안에 있는데 부처님만 이 삼신불이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도 다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고 착각하고 집착하면 삼신불이 못 되고 번뇌망상이 됩니다.  그런데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 성품 안에 삼신 여래가 다 있습니다.
  그럼, 왜 보지 못하느냐? ‘실체가 있다, 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못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법적인 사고만 벗어나서 초월하면 똑같이 세 몸 여래(三身如來)가 자기 성품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화신불이고 보신불입니다. 그러니 별 차이가 없어요. ‘내가 있다’고 보느냐, ‘내가 없다’고 보느냐 그 차이에요.
  ‘실체가 없다, 공이다’ 이렇게 보면 자성 속에 삼신불이 다 있는데 ‘내가 있다’고 집착하면 그것이 번뇌망상이 되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결과가 됩니다. 그 차이는 내가 있다,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진짜냐? ‘없다’ 하는 게 진짜예요. 그런데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지요. 이 차이입니다.

  선지식아 들어라. 선지식에게 말하여 선지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색신色身 속에 있는 법성法性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라.
  “선지식아 들어라” 할 때 이 선지식은 우리를 얘기합니다.
  “스스로 색신 속에 있는 법성 가운데….” 이렇게 얘기하면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 삼신불을 보는 것은 간단합니다. 내가 없는 줄 알면 바로 삼신불을 보는 겁니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데 화신불, 보신불이 다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때문에 그렇게 안 됩니다. 근본根本 무명無明은 ‘내가 있다’ 하는 이겁니다.

  이 세 몸의 부처(三身佛)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의 부처(法身佛)라 하는가?
  선지식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가지 법이 자기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한 것을 행하고, 모든 선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선행을 닦는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자성 속에 있어 자성은 항상 청정함을 알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보지 못한다,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모두 일시에 나타난다.
  세상 사람의 성품이 깨끗한 것이 맑은 하늘과 같아 혜慧는 해와 같고, 또 지智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상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법(眞法)을 열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치게 밝아(內外明徹) 자기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 모든 법이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한다.
  스스로 귀의歸依한다 함은 무엇인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귀의한다고 함이다.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다

  이 세 몸의 부처(三身佛)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의 부처(法身佛)라 하는가?
선지식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 성품에 있다.

  본래는 깨끗해서 우리 마음속에 청정 법신도 있고, 그 청정 법신에서 화신불이 나와 자유자재하고, 또 보신불이 계속 매일 매일 좋은 날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그 효능이 안 나옵니다. 본래는 다 갖춰져 기능하고 있어요. 부처님도 보고 듣고 고단하면 주무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우리와 똑같이 기능하는데 우리는 부처님처럼 효능이 안 나와요. 이것은 결국 ‘ 내가 있다’는 그 착각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합니다. “오온이 모두 공인줄 알면 일체 괴로움과 재앙으로부터 벗어난다.” 어째서 오온이 공인지는 이제 다 아시지요? 내가 보고 듣고 하는 데 왜 없다고 무아無我라 하느냐?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독립된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는 ‘없다’고 하면 허망하고 공허하고 아무 것도 없다고 또 착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없다고 하는 것을 바르게 알면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지면서 태양과 같은 지혜가 나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연기로 보는 것과 ‘있다-없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보는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오온五蘊이 공空이라는 것,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연기를 이해했다면, 왜 바로 부처님처럼 그렇게 안 되느냐?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게 안 나타나는 거예요.
  실제 마음으로 양변을 여읜 것을 체험하게 되면 부처님과 똑같이 본래 있는 것이니 저절로 나타납니다. ‘내가 없다’고 하는 본래 그 자리를 진공眞空이라면 거기에서 지혜로운 햇빛이 나오는 것을 묘유妙有라 합니다. 본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있다-없다’는 망상을 걷어내면 진공묘유眞空妙有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그렇게 자유롭게 하고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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