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좌선坐禪(1)

  불교 수행에서 대표적인 게 좌선입니다. 육조 스님의 이 <단경>을 통해 좌선의 본래 의미를 바르게 알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선지식아! 이 법문에서 좌선坐禪이란 원래 마음에 집착(著)하지 아니하며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며, 또 움직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하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다.
  만약 깨끗한 것을 본다고 말하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다.
  자기 성품이 본래 깨끗한 것을 보지 못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한 것을 보면 오히려 깨끗하다는 망상(淨妄)이 생긴다.
  망상은 처소處所가 없다.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허망된 것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는데 오히려 깨끗하다는 모양을 세워 공부라고 말하면,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된다.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이는 자성自性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 몸은 움직이지 않으나 입을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니 도와는 어긋나 등진다.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는 것은 오히려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다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 일체 걸림이 없어(無碍)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다.
  또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만약 밖으로 모양(相)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하다.
  만약 경계에 부딪히면 어지러우니 모양을 여의고 어지럽지 아니하는 것이 정이다. 밖으로 모양을 여읜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는 것이 곧 선정禪定이라 이름한다.

  <유마경>에 말하기를 ‘즉시 활연히 깨달아 본래 마음에 돌아 간다’ 하였고, <보살계>에 말하되,  ‘본래 근원인 자기 성품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선지식아, 자기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고 스스로 짓는 것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 행위(佛行)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佛道)이다.

  “선지식아! 이 법문에서 좌선坐禪이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며, 또 움직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좌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좌선이란 움직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좌선한다고 꼼짝 안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깨끗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그래서 만약 마음을 본다(看)고 말하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다.”
  앞에서는 “마음에 집착(著) ... ” 하다가 여기는 마음을 본다는 ‘간看’자를 썼습니다.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이 원래 허망하다. 마음이라는 것이 허망하지요. 이 생각 저 생각, A라는 생각을 하다가 금방 B라는 생각하지요. 이처럼 마음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악한 생각했다가 착한 생각, 별별 생각을 다 일으키는 것이 마음이에요. 마음은 허망한 거예요.

  “만약 깨끗한 것을 본다고 말하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이 진여를 덮은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해요. 그 깨끗한 성품에서 악한 생각도 내고 선善한 생각도 내어 악惡한 생각 낼 때는 그게 더럽혀지고 선한 생각 낼 때는 깨끗해지고 하는 게 아니에요. 본래는 선악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깨끗해요.
  사람의 성품이 본래 깨끗하지만, ‘우리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망념이 되어 깨끗한 마음(眞如)을 덮어버리니 망념만 여의면 본성은 깨끗합니다.
  그런데 본래 깨끗한 본성을 덮고 있는 이 망념妄念이 다른 게 아닙니다. 계속 얘기합니다. 있다-없다 두 가지로 나누어 놓은 게 망념이에요. 그것만 없애면, 그 없앤 상태에서 작용을 일으키면 그것이 깨끗한 마음으로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등하게 보고 어디에 집착 하지 않고 자유자재 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참 수좌 중에 한 분은 이 대목을 흙탕물로 비유하더군요. 흙탕물은 탁해 무엇을 씻더라도 깨끗하게 안 씻겨요. 그렇지만, 그 흙탕물을 그대로 놔두면 흙이 가라앉지요. 그러면 뿌옇던 것이 맑게 되잖아요. 맑은 물만 따라내어 씻으면 깨끗하게 씻기기도 하고 아무리 흔들어 출렁거려도 맑은 물이 출렁거립니다. 이것이 정확한 비유는 아니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망념妄念, 있다-없다 하는 것이 있는 한 어디에 집착하게 되고 차별하게 되고 그로 인해 내가 구속당하고 지배받고 심지어 나중에는 스스로를 학대까지 합니다. 그런데 양변을 여의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고, 또 비교를 안 하기 때문에 마음도 평화로워집니다. 본성이 깨끗하기 때문에 망념만 여의면 그렇게 됩니다.

  “자기 성품이 본래 깨끗한 것을 보지 못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한 것을 보면 오히려 깨끗하다는 망상(淨妄)이 생긴다.”
  이것은 깨끗하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거에요. 이런 분 많습니다. 앞에서도 예를 들었습니다만, 계율 철저히 지키는 분이 스스로 계율을 철저히 지킨다는 망념에 빠져 계를 안 지키는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더럽게 여기는 경우가 있지요? 이것은 깨끗한 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고, 깨끗하다는 망념을 지키는 사람이지요. 부처님은 이런 분을 계금취戒禁取라 했어요. 계에 집착하는 사람이란 말이죠. 진짜 계  지키는 사람은 본래 깨끗한 이 마음으로 계를 철저히 지켜가면서 계 안 지키는 사람을 보더라도 부처님처럼 연민으로 보지요. 미워하거나 업신여긴다거나 더러운 것 보듯이 그렇게 해서 안 됩니다.
  여기도 자성이 본래 깨끗한 것을 알지 못하고 깨끗하다는 경계를 보면, 깨끗하다는 망상에 빠져 버린다. 이것은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망상은 처소處所가 없다.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허망된 것임을 알라.”
  망상은 처소處所가 없어요. 망상妄想이라는 것은 있다-없다는 착각이고 꿈입니다. 그건 실체가 아니죠. 그래서 처소가 없어요. 그렇게 깨끗하다-더럽다 라고 보는 그 자체가 망상입니다.

  CTL 사견(私見) 우리의 마음도 불이다. 불은 처소가 없다. 분명히 우리에게서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온 곳이 없이 와서 타오르며, 또한 간 곳 없이 스러져 사라진다. 머무르는 것도 아니요,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깨끗하다' 혹은 '더럽다'는 생각 자체는 깨끗한 것도 아니요, 더러운 것도 아니다. 불을 가지고 '깨끗하다' 혹은 '더럽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은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다.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허망된 것이니, 마음이라는 불을 본다는 것 자체가 허깨비를 보겠다는 것이고, 환상을 보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가 하는 공부에 집착하여 상을 내지 말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는데 오히려 깨끗하다는 모양을 세워 공부라고 말하면,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된다.”
  깨끗함에 집착하여 깨끗하다는 상을 세워 이게 공부다 이렇게 말하면, 이 견해를 일으킨 이는 스스로 본래 모습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하다는 속박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깨끗하다는 속박에 빠지면 항상 더럽다-깨끗하다는 양변에 얽매여 스스로 거기에 갇혀 자유로울 수도 없고 평등할 수 없고 그래서 스스로를 몹시 학대까지 합니다.

CTL 사견(私見) 무엇인가가 있기 위해선 그 자리에 그 만큼의 끊임없는 없음이 있어야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니, 깨끗하다는 상을 세우는 것은 더럽다는 상을 그 조건으로 하여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깨끗하다 말하면서, 그와 동시에 스스로 세운 더럽다는 다른 변의 상은 보지 못함이니, 스스로 양변에 속박되는 일이다. 한 생각 일으키니 두카(苦)라!


어느 선원에서 일어난 조용한 좌선의 집착 사례

  실제 어느 선원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선원은 보통 오전 11시에 방선放禪을 하지요. 제사가 있으면 10시 30분 쯤 법당에서 부전 스님이 천수경하면서 불공을 합니다. 선원과 그렇게 하기로 다 약속이 되어 있지요. 그런데 10시 30분에 올라가 목탁 치고 염불하니까, 선방에서 한 스님이 그 소리가 듣기 싫다고 법당에 올라가 수십 여명의 불공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님의 목탁, 요령을 뺏은 일이 있었습니다. 불공을 하다 말고 싸울 수도 없고 하니까, 목탁, 요령 없이 그냥 목소리로만 불공을 했답니다. 그래서 이 일로 선방에서 대중공사를 해서 그 스님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스님이 나중에 내게 와서 하는 말이 “스님! 저는 중놀이 잘 하자고 하는 건데 왜 뭐라 하십니까?” 해요. 그래서 “스님은 잘하자는 변에 떨어져 집착하는 사람이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요하다-시끄럽다, 고요해야만 공부가 된다 하는 집착에 빠져 있는 겁니다. 실제 이 양변에 집착하면 굉장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 또 혼자만 갈등하지 않지요. 다른 사람까지 구박하고 학대하게 됩니다.

  진짜 잘하는 것은 잘한다-못한다 그걸 여의어야 되고, 시끄럽다-고요하다도 여의어야 되고, 깨끗하다-더럽다도 여의어야 됩니다. 이것을 여의어야 진짜 깨끗한 거예요. 이것을 안 여의고 더럽다-깨끗하다 양변이 있는 한 그것은 깨끗한 것이 아니에요.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평화적인 연민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나오게 됩니다.

  지금 좌선坐禪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움직이지 않는다 함은 안으로 어지럽지 않는 것입니다. 안으로 어지럽지 않는다 함은 방금 선방에서 시끄럽다-고요하다는 것 때문에 어지러워진 사람, 이런 사람은 어지럽고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변에 집착하고 있으면 항상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양변에 집착 안 하는 사람은 항상 안 움직이는 겁니다. 조용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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