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무념無念(4)

  “선지식아! 밖으로 모든 모양(相)을 여의는 것이 무상無相이다. 다만 모양을 여의면 성품의 체體는 청정하다. 그러므로 무상으로서 본체를 삼는다.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무념無念이라 하니, 스스로 생각 위에 경계境界를 여의어 법에 대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다.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을 모두 없애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 남(生)을  받게 될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마음을 써서 법의 뜻(法意)을 쉬어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미혹한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 경전의 법을 비방하니, 그러므로 무념無念을 세워 종으로 삼는다(無念爲宗).
  미혹한 사람이 경계境界 위에 생각을 두고 그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긴다.

  “선지식아! 밖으로 모든 모양(相)을 여의는 것이 무상無相이다.”

  밖으로 보이는 사람이나 물건, 무엇이든지 다 좋습니다. 밖으로 보이는 것은 다 상相을 여의라. 상을 여읜다는 말은 실체가 없고 공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밖으로 보이는 모든 형상(相)을 실체가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이쁘다-밉다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잘못 보는 겁니다. 어떤 형상도 중도연기中道緣起로 보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무상無相입니다. 그러면 그 형상에 집착을 끊어 구속되지 않고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유자재한 삶이고 영원한 행복의 길입니다.

  “다만 모양(相)을 여의면 성품의 체는 청정淸淨하다.”

  상을 여의게 되면 성품의 체體, 그것이 청정하다. 청정하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뜻이죠. 이 깨끗하다도 더럽다-깨끗하다 하는 이분법적인 그런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더럽다-깨끗하다를 초월한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깨끗하다’ 하면 ‘더럽다’와 상대되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금덩어리를 보면서 ‘저것은 좋은 것이다’ 하면서 ‘나쁘다’의 반대되는 ‘좋다’로 본다면 그것은 제대로 깨끗하게 본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똥덩어리를 보고 깨끗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금덩어리를 보고 깨끗하다고 한 것보다 더 위대한 겁니다. 똥덩어리를 보고 깨끗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똥덩어리 보고 깨끗하다 말하는 것은 더럽다-깨끗하다를 초월했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금덩어리나 똥덩어리나 꼭 같이 청정해서 평등한 것을 알아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자재해야 합니다.


불교의 핵심인 중도연기中道緣起를 이해하여 정견을 갖춰야

  이 청정淸淨도 더럽다의 상대되는 청정으로 보면 안됩니다. 계속 같은 말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계속 할 겁니다. 이게 중도연기입니다. 이 중도연기가 부처님이나 육조 스님이 깨친 내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불교가 사실은 이것 하나 제대로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 중도연기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正見을 갖추는 겁니다. 정견을 안 갖추면 불교가 귀중한 줄 몰라요. 부처님 가르침이 귀중한 줄 모릅니다. 불교가 귀중한 것을 모르면 나의 존재원리가 귀중한 것도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믿지 않고 끝없이 낮춰 보아 비교하고 구박하며 그렇게 불행하게 억울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연기를 바로 알아 정견을 세우면, 자기 자신이 굉장히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유롭게 살아갈 가치관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품의 체가 청정한 것을 모르면 자기가 위대한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구박하고 살고 있는지 … 또, 스스로를 얼마나 저속하고 천하게 만들며 살고 있는지 … 조그마한 이해관계에도 나와 남에 집착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소한 이해관계에도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무념無念이라 하니, 스스로 생각 위에 경계境界를 여의어 법에 대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일체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 할 때 무엇을 물들지 않는다고 하느냐? 집착하면 물드는 겁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물들지 않는 것이죠. 있다-없다, 좋다-나쁘다에 물들지 않습니다.
  물 안 들려면 모든 경계 대상이나 그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意識도 전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체 경계도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다. 그것을 느끼고 보는 그 의식도 실체가 없고 공이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스스로 그 생각 위에 경계를 여의어” 할 때 생각 위에 경계가 뭐냐면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다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알면 저 법 위에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죠.


순경계ㆍ역경계를 만났을 때

  그런데 깨달으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저절로 그렇게 보여져요.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가 경계에 끄달리지도 않고 지배받지도 않고 구속되지도 않고 자기 학대하지도 않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 때, 좋아하지 않는 경계를 만났을 때, 누가 나를 욕 한다든지, 손해를 입었다든지, 그런 역경계를 만나 속상해 할 때, 그게 마음에 머물러 오래 가지요. 그것이 하루 가는 사람도 있고, 열흘 가는 사람도 있고, 한 달 가는 사람도 있고, 일 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한 사람은 그걸로 쇼크를 받아 중풍이 들거나 죽는 사람도 있어요.
  순경계順境界, 즉 좋을 때는 의식 못하지만, 역경계를 만났을 때는 거기에 머물러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이 마음속에 머물러 스트레스를 일으키는데 그때만이라도 ‘그래, 연기현상이고 공이다.’ 이렇게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한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하고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그것이 단련이 됩니다. 그렇게 단련이 되면 역경계를 만나 스트레스 받는 일도 훨씬 수월하게 넘길 수가 있게 되면서 그 역경계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나오게 됩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순경계인 좋은 것도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지는 못했지만 일상생활에서 그런 정견으로 보는 안목을 자꾸 기르면 그것이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불교를 생활화하려면 정견부터 갖춰야 한다.

  오래 전부터 교계에서 “불교를 생활화 하자”는 운동과 논의가 많이 있었습니다. 교계 신문에서 그런 캠페인도 하고 그런 내용의 법문도 많이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후 주변에 나타나는 모습은 생활화生活化가 아니라 세속화世俗化입니다. 진짜 생활화는 안 하고 세속화되어 가고 있어요. 왜 그러느냐? 정견正見이 안 갖춰져서 그렇습니다. 정견이 갖춰진 사람이라면 그 생활화가 바로 수행입니다. 부처님 교법을 바르게 이해하여 정견을 세울 줄 알게 되면, 그 정견을 지속해 나가는 게 절을 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참선을 한다든지, 봉사를 한다든지 하는 수행과 꼭 같습니다. 그렇게 향상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앞에서부터 언행일치言行一致를 강조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언행일치입니다. 바로 알도록 노력하고 그 앎을 실천하고 성찰하고 지속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게 공부입니다.


달라이라마, 틱낫한과 한국 불교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이 세계에서 한국불교만큼 법을 깊이 보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조사선 전통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안목은 굉장합니다. 다른 어느 나라 불교 보다도 경쟁력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폄하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한국불교는 틱낫한 스님이나 달라이라마 스님의 가르침보다 더 깊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틱낫한이나 달라이라마 스님만큼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지 못한 것이 솔직한 현실 아닙니까? 실제로 어떤가요?
  이것은 한국불교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에요. 엉뚱한 사람들은 간화선 때문에 그렇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바로 공부 따로 생활 따로 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행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아요. 언행일치가 안되고 있어요. 법문이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천 안 하는 것을 제쳐놓더라도 정견正見도 못 갖추고 있으니 이게 문제입니다. 정견을 안 갖추면 세속 눈으로 보는 겁니다.
  스님들의 경우 무엇 때문에 출가를 했습니까? 출가의 위대한 결단을 내리고 세속을 떠나 부처님 제자의 길을 가겠다고 발심發心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 정견이라도 갖추고 생활화 하면 스스로도 득이 되고 남에게도 득이 됩니다.


마음이 편해지려면 먼저 정견을 갖춰야 한다.

  불교를 생활화하려면 가장 먼저 정견을 갖춰야 하는데 정견을 갖추면 이 세상이 평등한 줄 알아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보다 마음이 편해요. 앞에 어떤 차별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끄달리거나 지배받지 않고 자유자재할 수가 있게 됩니다. 비교를 안 하니까요. 비교 할 때는 나보다 나은 것이 나타나면 내가 위축되고 또 나보다 못한 것이 나타나면 교만하고 이렇게 끄달리며 살던 것이 정견만 갖춰도 그것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정견이 중요합니다.
  바른 불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아 정견을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정견을 세우고 생활화해 나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불교가 일상생활에서 굉장히 유용하고 위대한 가르침이란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게 바로 수행입니다.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을 모두 없애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태어나게 된다.”

  근본적으로 아무 생각 안 하는 것이 무념無念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견斷見, 상견常見할 때 단견에 떨어지는 겁니다. 단견에 떨어지면 안 돼요. 상견, 단견은 이분법적인 사고입니다. 없다는 생각은 단견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백 가지를 생각하지 않아 생각을 다 없애지 말라. 이것은 단견에 떨어지지 말라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단견이 된 사람이 한 생각이라도 끊기면 곧 다른 곳에 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다른 곳(別處)은 ‘단견에 떨어지는 곳’ 이렇게 가볍게 보고 넘어갑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어라.”
법의 뜻(法意)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말합니다. 그래서 법의 뜻을 쉬어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자기 혼자 잘못되는 거니까 괜찮지만 사실은 그것도 괜찮은 것은 아니지요. 잘못된 것을 타인에게 권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무념을 잘못 이해해서 다른 사람한테 그릇되게 말해서는 안되겠지요.

  “미혹한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 경전의 법을 비방하니, 그러므로 무념無念을 세워 종으로 삼는다(無念爲宗).”
  무념無念이나 무상無相에 대한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부처님 경전이나 법을 비방하니, 무념을 세워 종宗을 삼아야 만 부처님 법도 비방 안 하고 우리가 못 보는 것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미혹한 사람이 경계境界 위에 생각을 두고 그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긴다.”
  이게 법의法意입니다. 앞에 “법의를 쉬어라” 했던 그것입니다. 그래서 경계 위에 있다-없다 생각을 일으키지요. 그 있다-없다는 생각 위에 또 삿된 견해를 일으킵니다. 있다-없다 집착한 그것이 삿된 견해예요. 그 삿된 견해 때문에 우리는 경계에 끄달리고 지배받고 자기를 학대하고 남도 학대하는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妄念)이 이로부터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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