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무념無念(3)

<육조단경>의 문제 대목

  “그러나 앞 생각(前念)과 지금 생각(今念)과 뒷 생각(後念)이 생각 생각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색신 色身을 여읜다.”

  이 부분이 <육조단경>에서 문제되는 대목입니다. 생각 생각이 계속 일어났다-꺼졌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접어 두고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색신을 여읜다” 이렇게 적혀 있어요. 법신과 색신, 이 두 개를 나눠서 얘기하고 있지요. 여기에서는 법신과 색신을 단절하면 서로 분리되는 겁니다.
  <반야심경>에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 합니다. 그러면 오온이 뭡니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인데, 색은 이 몸도 되고 이 세상의 모든 형상 지어진 존재를 색이라 합니다. 이 책도 색이고, 펜도 색입니다. 이 색은 광범위한 의미가 포함되어 몸만이 아닙니다만, 좁혀서 보면 몸도 공이라 했고, 수상행식도 공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색신과 법신이 단절된다. 색신과 법신을 둘로 나누어 보고 있습니다. 법신法身이 곧 우리 정신인양 뉘앙스가 풍깁니다. 그리고 색신은 우리 몸으로 본 것이죠. 그래서 한 생각이 끊어지면 이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죽는다. 그렇게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온이 모두 공이다”는 견지에서 보면, ‘육체도 공이고 정신도 공이다’는 걸로 보면 이 말이 안 맞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 때문에 육조 스님 제자 중에 남양 혜충(?~775, 南陽慧忠) 국사가 있는데 육조가 입적(713)하시고도 오랫동안 살아계셨습니다. 이 분이 계실 때 이미 <단경>이 편집이 되었던가 봐요. 그 이야기가 [전등록] 남양 혜충 국사편에 나옵니다.
  “내가 전에 행각을 다닐 때에도 이런 무리를 많이 보았는데 요새는 더욱 번성하고 있다. 3백, 5백 대중을 모아 놓고 눈으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남방의 종지’라 한다. 단경壇經을 꺼내다가 이리저리 바꾸고, 누추한 말을 섞어서 성인의 뜻을 깎아 버리고, 후학들을 어지럽히니, 어찌 가르침이라 하겠는가. 애닯은 일이다. 우리 종宗은 망하는구나.”
  눈 먼 무리가 단경에 손을 대서 어지럽게 되었다. 후대에 굉장히 혼란에 빠질 것으로 보고 걱정하고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육조 스님 제자 가운데 남양 혜충南陽慧忠, 청원 행사靑原行思, 남악 회양南嶽懷讓, 하택 신회荷澤神會, 영가 현각永嘉玄覺 스님을 5대 제자라 합니다. 남양 혜충 국사는 북방에서 활동을 했답니다. 이 분이 주장한 법이 몸과 마음이 하나다는 심신일여心身一如입니다. <금강경>에도 “색신色身이 법신法身이고, 법신이 색신이어서 둘이 아니다” 그렇게 봐야 합니다. 이게 바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처럼 ‘색신과 법신이 분리 된다’ 하면 이원적인 사고에 빠집니다. 이런 곳이 <육조단경>에서 잘못된 대목입니다. 그래서 혜충 국사가 걱정한 대로 저속하게 고쳐졌다는 거예요. 당시에도 이미 그런 걱정을 했답니다. 나는 이 대목을 말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대목을 좋게 봐주려면 모든 존재가 연기니까, 인연이 합해졌다가 흩어진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조금 이해는 됩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법신은 정신이고, 뒤에서 말한 색신은 육체, 이렇게 보면 상당히 문제가 있으니, 연기되었다가 그것이 흩어지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려면,

  “생각할 때마다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으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 머물러 이를 얽매임이라 하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을 여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머무른다는 말은 집착으로 봐야 합니다. 그럼 왜, 집착하느냐? 그게 실체고 있다고 보게 되면, 이분법二分法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겁니다. ‘있다-없다’ 이분법으로 보면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머물게 되고 머물게 되니 자유할 수가 없지요. 구속, 속박이 됩니다. 그래서 무슨 물건이든 생각이든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자유할 수가 없어요. ‘좋다-나쁘다’ ‘있다-없다’ 계속 그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면 자유로울 수 없고 속박되어 버립니다.
  왜 속박 되느냐? ‘있다-없다’ 하면, 귀천, 고하가 있고 그로부터 분별심을 일으켜서 괴로움도 일으켰다, 즐거움도 일으켰다 하는 희로애락을 계속 하게 되지요. 때문에 그 자체가 속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고,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있다-없다’ 이분적인 사고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또 “모든 법 위에 생각생각이 머물지 않으면,” 이건 집착 안 하는 겁니다. 집착 안 하는 것은 뭐냐? ‘있다-없다’ ‘좋다-나쁘다’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차별경계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마주치는 경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그건 속박이에요.
  예를 들어 내 앞에 역경계逆境界가 나타났다고 봅시다. 누가 나를 욕한다, 모함한다, 할 때 그 모함과 욕하는 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체험한 사람은 화내지 않고 부처님처럼 그 상대를 연민합니다.
  또 한 예를 듭시다. 일본 사람들이 임진왜란 일으켰을 때 서산, 사명 스님은 침략한 일본 군사들을 연민으로 대했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모르고 내 나라, 네 나라에 집착하여 남의 나라에 와서 약탈하고 살육하여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니까, “그 집착 때문에 나쁜 짓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연민하면서 그 집착을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의 차원에서 서산 스님, 사명 스님이 전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 분은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우리나라 사람, 적국, 적국 사람 거기에는 증오심이 따릅니다. 증오심이 따르기 때문에 절대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소리-나쁜 소리를 들으면 좋은 소리 들으면 좋다고 지배당하고, 나쁜 소리 들으면 기분 나쁘다고 마음에 담아 계속 거기에 지배받고 살고 있습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자유로울 수 있다.

왜 그렇게 사느냐? 집착 때문입니다. 그럼 괴로움을 낳는 집착은 왜 생기느냐? 이분법적인 사고 즉, ‘있다-없다’ ‘너다-나다’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유롭게 살 수 있느냐? 내가 없다는 것만 알면 모든 것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물면 생각생각이 머물러 그것이 구속된다. 모든 법에 생각생각이 머물지 아니하면 구속으로부터 해탈한다는 것입니다. 이 속박의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원인입니다. 내가 없다(無我)는 것,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인 줄 알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예를 들어 벌이 방에 들어와 창문을 뚫고 나가려다 나중에 스스로 지쳐 죽습니다. 만약,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열린 문으로 나가서 이 꽃, 저 꽃 다니면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생각 생각마다 그 생각에 묶여 좋은 것을 보면 좋은 것에 묶이고, 나쁜 것을 보면 나쁜 것에 묶여서 꼼짝달싹 못하고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정말로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발견한 이 세계, 이 존재 원리라는 것은 부처님만 그렇게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손톱만큼도 다름없이 똑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효능 면에서는 부처님과 하늘과 땅 차이가 있지요. 억울합니다. 하지만 그 억울함이 다른 사람이 만든 게 아니고 내가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고 내가 그렇게 또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는다.”
  이 무주無住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상에서 상을 여의고 생각에서 생각을 여의고 또 우리 생각이 본래 무주無住다. 어디 머무르면 집착이 되어 벌이 창문을 뚫고 나가려다가 나중에는 힘이 없어서 떨어져 죽듯이 우리는 그렇게 죽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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