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무념無念(2)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를 삼으며, 무주(無住)로서 본을 삼는다.
  무엇을 무상無相이라 하는가?
  무상이란 모양(相)에서 모양(相)을 여읜 것이고, 무념無念이란 생각에서 생각을 여읨이오. 무주無住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앞 생각(前念)과 지금 생각(今念)과 뒷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색신色身을 여읜다.
  생각할 때마다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으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 머물러 이를 얽매임이라 하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을 여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는다.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돈점頓漸을 모두 세워 무념으로 종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를 삼으며, 무주(無住)로서 본을 삼는다.”
  거의 같은 말입니다.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본을 삼는다.

  “무엇을 무상無相이라 하는가?
무상이란 모양(相)에서 모양(相)을 여읜 것이고, 무념無念이란 생각에서 생각을 여읨이오, 무주無住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물지 않는 것이다.”

  무상無相, 즉 모양에서 모양을 여읜다는 말이 이해가 어렵지요?

  보통 사람은 ‘있다-없다’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상無相이라 하면, 상을 없애는 것으로 이해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불교에서 ‘무상無相’이라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여읜다.’ ‘모양을 두고 모양을 여읜다.’ 이 말입니다.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겁니다.
  생로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로병사가 없다고 하니, “죽어서 없어진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해하기가 굉장히 쉽지요.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생로병사가 없다”는 말은 그게 아닙니다. 생로병사를 그대로 두고 생로병사가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생각에서 생각을 여읜다.’는 무념無念은 아무 생각을 안 해서 생각을 여의는 게 아니고, ‘생각하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있다-없다’ 이 두 가지 틀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니 무상無相이라 하니 상을 없애어 무상이고, 무념이라 하니 생각을 없애어 무념,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이분법적인 사고라면, 불교는 연기적인 입장으로 보아야 합니다. ‘생로병사가 없다’ 할 때 죽어서 없는 것이 아니고, ‘생하는 것 그대로 없고, 또 병든 것 그대로 없고, 늙는 것 그대로 없고, 죽는 것 그대로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무상無相 즉, ‘상에서 상을 여읜다’는 말은 무엇인가? 앞의 상은 ‘있다-없다’ 하는 상입니다. 그러니 상이 있다는 말이죠. 그 다음 ‘상을 여의었다’는 것은 ‘좋다-나쁘다’ ‘깨끗하다-더럽다’ ‘높다-낮다’ 이런 이원적인 분별심을 깬 상태의 상을 여읜다고 합니다.
  예를 보면, 지금 보고 있는 책이나 펜, 책상, 컵, 안경 등은 다 모양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가정하면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짚으로 짚신, 새끼, 가마니를 만드는데 그 모양만 보면 다 차별이 있지요. 가마니, 짚신, 새끼의 형상이 다 달라요. 그러나 그 만든 재료를 보면 짚이니 하나예요. 이걸 상에서 상을 여의었다고 합니다. 이게 차별심이 없다는 거예요. 금과 짚은 무아고 공입니다.  

  이렇게 보면 앞에 말한 ‘법에는 돈점이 없다’는 그 자리를 보게 됩니다. 성품을 바로 보고 우리가 그렇게 이해도 할 수 있는데 성품 말고 만들어진 제품 그대로 놔두고 상을 여의어 그 본 자리를 보면서 상과 본체가 둘이 아닌 것을 이해하게 되지요. 이것이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이게 불교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면 도인道人입니다.

  일상생활에 앞집-뒷집, 남편-부인 비교를 한다고 했지요? 이것이 괴로움(苦)인데, 상에서 상을 여의면 비교할 게 없이 똑같아요. 그러면 자기 학대도 안 하고 남도 학대 안 합니다. 그래서 비교하지 않고 학대하지 않으면, 그게 괴로움을 여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이 사라지지요?

  무념無念도 똑같습니다. 생각하면서 생각을 여읜다는 것입니다. 무념은 주관적인 분별심을 여의고 모든 것을 본다. 무상無相은 객관적인 모양이나 물체를 보면서 분별심을 여의고 본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무념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고, 무상은 객관적인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그렇게 보는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무주無住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앞 생각(前念)과 지금 생각(今念)과 뒷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이어져 끊어짐이 없으니,“

  이 무주無住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원리의 성품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이 생각-저 생각으로 넘어가고, 또 이것 봤다-저것 봤다, 여러 생각이 일어났다-꺼졌다, 잠시도 머물지 않고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어느 철학자가 “아침에 흘러가는 물에 발을 담그면, 그 흘러간 물은 다시 발을 적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모양만 보면 같은 물이 계속 내려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침에 담갔던 그 물이 다시 돌아와서 그 발을 적시고 지나가지는 않습니다.

  어릴 때 정원대보름날 쥐불놀이를 하는데 멀리서 보면 깡통 돌리는 것이 원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점입니다. 점이 속도가 붙으니 원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계속 뭘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이 느끼는데 실제 우리 존재원리는 일어났다-꺼졌다, 일어났다-꺼졌다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지속적으로 향상시켜 나아가 8식八識 경계, 숙면일여熟眠一如 정도에 들어가면,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면 방안 먼지가 보이듯이 미세한 생각이 보입니다.
  그래서 삼세육추三細六麤 이야기할 때, 삼세 때의 미세한 먼지가 보이듯이 육추의 거친 것은 없어지더라도 미세 망념이 남아서 마지막 숙면일여를 투과해야 완전히 견성이라고 합니다. 그때 상태는 지금 못 느끼지만, 무의식 세계에서는 그런 미세 망념이 일어나고 있고 잠재의식, 6식六識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의식을 느끼고 있지만, 의식은 뭔가 있어서 계속하는 걸로 느껴요. 실제로는 일어났다-꺼졌다를 계속 반복합니다. 그래서 우리 의식은 무주無住입니다. 의식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무주예요. 그래서 무상無常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항상 변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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