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정定·혜慧(2)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첫째로 미혹하여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體)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작용(用)이니, 곧 혜가 작용할 때는 정이 혜에 있고, 또 정이 되어 있을 때에는 혜가 정에 있느니라.

   선지식아!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평등하니, 도를 배우는 사람은 뜻을 짓되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법에 두 가지 모양이 있으니 입으로 선한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못하며 정혜가 평등하지 아니함이요, 마음과 입이 함께 선해서 안팎이 하나가 되면 정과 혜가 곧 평등할 것이니라.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것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다툰다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승부심을 끊지 못한다. 승부를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이라는 아집이 생겨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함이니라.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는다.”

   이것 밖에 없어요. 정과 혜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이 몸뚱이에도 정과 혜가 있어요. 또 듣고 보고 하는 정신에도 있지요. 이 몸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할 때 색이라면, 수·상·행·식은 정신 아닙니까? 이 정신에도 정혜가 있어요.

   이 색·수·상·행·식 할 때 색은 산스크리트어로 루빠(rupa, 色)라고 합니다. 루빠는 이 몸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형상지어져 있는 것을 말하지요. 나를 바로 보는 것과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을 다 합해서 정혜定慧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체를 법성法性이라 하고, 개체를 자성自性이라 하거든요. 법성과 자성이 둘이 아니잖아요. 그 전체를 놓고 유정有情, 무정無情도 다 포함시키고, 주관과 객관을 다 포함시켜서 그것을 하나로 뭉쳐서 ‘마음(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 주관과 객관의 모든 세계가 정과 혜로 되어 있다. 그게 근본으로 되어 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종禪宗에서는 더러 ‘무정無情 설법說法’이란 말을 씁니다. 무정無情, 아무 정도 없는 바위나 흙, 바람 이런 것이 설법을 한다. 그게 어떻게 설법을 하느냐? 그것이 정과 혜로 근본을 삼아서 그렇게 작용하는 줄 알면, 무정물에 대한 설법을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객관세계는 놔두고 주관세계를 보면 정과 혜로 되어 있습니다. 이 주관세계를 몸과 정신으로 분리해 보자는 거지요. 그러면 정신도 정과 혜로 되어 있고, 이 육체도 정과 혜로 되어 있습니다.

   ‘정定’은 무엇을 얘기하고 ‘혜慧’는 무엇을 얘기하느냐?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정은 ‘법신法身’이라 하고 혜는 ‘색신色身’이라 합니다. 이 정과 혜가 우리 존재의 근본이며, 정혜로써 근본을 삼는 것입니다.

   “나의 이 법문은 … ” 하는 것은 이 법문이 다른 법문이 아니라 우리 존재원리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불교는 어렵다”고 하는데 사실은 어려운 게 아니에요. 이 원리만 알면 불교가 쉽습니다. 정혜뿐이에요.

그러면 그 정혜가 멀리 있느냐?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것입니다. 보고 듣고 하는 바로 이놈이 정혜(體·用)로 존재하면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듣는 것, 얘기하는 이것은 작용으로 ‘혜慧’입니다. 이 혜를 일으키는 거기에 ‘정定’이 함께 있습니다. 또 정할 때는 혜가 함께 있고, 이걸 쌍차쌍조雙遮雙照라 표현합니다. 더 어렵게 느끼실 것 같아 안 하는데,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하는 바로 이 얘기예요.

“첫째로 미혹하여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손에는 손바닥과 손등이 같이 붙어 있습니다. 손바닥을 정이라고 한다면, 손등은 혜라 합시다. 그러면 손등인 혜를 보이면, 정인 손바닥이 뒤에 가 있잖아요. 또 그 반대로 손바닥인 정을 보이면 손등인 혜는 뒤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같이 붙어 있어요. 이게 분리되어 있다고 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청정도론>이나 초기불교에서는 “사마타를 닦고 위빠사나를 닦는다.” 이런 얘기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면 “정혜를 함께 닦아야 된다.”는 말도 나옵니다.

   대승불교는 “정혜를 분리시키면 마구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분리될 수가 없어요. 착각에 의하여 양변으로 분리하면 중생이라 하고, 양변을 여읜 하나가 된 자리, 응무소주 자리, 백척간두 자리에 있으면 도인道人이라 하고, 나다-너다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 생사심生死心이라 합니다. 정혜가 본래 하나로 존재하여 있기 때문에 본래성불이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미혹하여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體)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작용(用)이니”

   분명히 말씀하지만, 정과 혜의 몸. 즉 체體가 하나입니다. 손바닥과 손등이 다르지만, 손은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다만 어느 때는 손바닥이 또 어느 때는 손등이 보여지지요. 다 같은 손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른 얘기가 아니라,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지금 보고 듣는 것은 혜慧가 하고 있는 겁니다. 혜가 하고 있는데 정이 같이 있어요. 떨어져 나간 게 아니에요. 같이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못 보고 있어요. 그것까지 보면 생사심生死心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유자재하는 지혜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그게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데 지금 혜가 듣고 보고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정이 같이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만 알면 <육조단경> 더 볼 필요도 없지요. 그런 사람은 단경을 쓰레기통으로 버려도 됩니다.

   “정과 혜는 몸(體)이 하나이고 둘이 아니다. 곧 정은 혜의 몸이고 혜는 정의 작용(用)이다.” 지금 우리는 작용하고 있잖아요. 정이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작용을 안 할 때에는 혜의 몸이 작용 안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듣고 보고 있으니까 작용하고 있어요.

“곧 혜가 작용할 때는 정이 혜에 있고, 또 정이 되어 있을 때에는 혜가 정에 있느니라.”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작용하는 것만 보니까 거기에 집착해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정이 작용하고 있는 줄 알면 그 작용이 실체가 없고 무아라는 것을 알텐데, 작용하는 것만 보니까 이것을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차이입니다.

“선지식아!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평등하니, 도를 배우는 사람은 뜻을 짓되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정을 익혀야 혜가 나온다” 그런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잘못됐습니다. 그것은 정과 혜를 분리해서 닦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합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삼매는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했습니다. 적적寂寂이 정定이고 성성惺惺이 혜慧입니다. 공부를 바로 하게 되면 적적성성 삼매에 들어가는 겁니다. 보통 외도外道들은 적적寂寂만 익힙니다. 적적만 익혀서 공부가 깊이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모든 행동이 정지합니다. 먹는 것도 정지하고 배설하는 것도 정지하고 모든 생리 작용도 정지합니다. 그래서 몇 달씩 몇 년씩 있다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인도의 요기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선요>를 보면, 삼매에 들어도 변소 갈 때 정확하게 변소 가고, 밥 먹으러 식당으로 정확하게 갑니다. 고봉 스님은 6일 동안 삼매에 들었는데 식당, 변소 정확하게 가요. 변소 간다는 게 식당에 가고, 식당 간다는 게 변소 가는 게 아니에요. 정확하게 갑니다.
   우리가 하는 적적성성 삼매 공부는 이 지구상에 불교밖에 없습니다. 다른 종교의 삼매는 적적寂寂만 합니다. 부처님이 우리 존재원리를 발견하고 그 발견한 대로 공부 방법도 만들었는데 이건 정말로 위대한 겁니다.
   그래서 여기도 정을 먼저 닦고 그 다음에 지혜를 개발한다고 하거나 혜를 먼저 개발해서 정을 닦는다고 하거나 그렇게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법에 두 가지 모양이 있으니 입으로 선한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선하지 못하며 정혜가 평등하지 아니함이요. 마음과 입이 함께 선해서 안팎이 하나가 되면 정과 혜가 곧 평등할 것이니라.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것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다툰다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승부심을 끊지 못한다. 승부를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이라는 아집이 생겨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함이니라.”

   도반들끼리도 이기려고 우기고 싸우는 사람들은 법을 두 모양으로 보고 이원적인 사고를 하고 양변에 집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승부심이 일어났을 때 양변을 여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기는 겁니다. 끝까지 이기려고 다투는 사람은 양변에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본 법하고는 어긋난 사람입니다.
   제가 불교의 핵심이라 한 정혜를 후대에는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선문禪門에서는 살활殺活, <화엄경>에서는 이理와 사事, 조동종曹洞宗은 명암明暗, 이렇게 표현합니다. 결국 불교에서 정혜 얘기 말고 다른 게 없습니다.
   황새와 뱁새 다리는 길고 짧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실체가 없고 연기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평등한 것을 압니다. 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걸 볼 때 황새는 황새 그대로, 뱁새는 뱁새 그대로 평등한 것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그것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우리가 한꺼번에 도인이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도인이 다 되었는데 평등한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모두 법을 똑같이 쓰느냐, 아닙니다. 모두 개성에 따라서 자기 개성에 맞게 법을 써요. 평등이라 해서 이것저것 절충해서 뒤섞어 놓자는 게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 서로서로 평등해서 우열을 따지지 않고 귀천을 따지지 않고 고하를 따지지 않고, 그렇게 서로서로 인정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겁니다. 평등하다고 해서 이것저것 뒤섞어 만드는 것은 평등이 아닙니다. 개성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인정된 대로 자기 능력을 무한無限 향상向上할 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평등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등하고 분명히 다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혜가 같으면 입으로 어느 것이 좋다, 어느 것이 나쁘다 다투는 게 없어져요. 또 정혜에 대한 선후를 다툰다면 그것은 평등한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승부심을 못 끊습니다. 그리고 법法에 대한 아집我執이 생겨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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