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정定·혜慧(1)

 
   이 「정혜품」이 실제 불교를 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다른 한 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 했는데 이것이 바로 “정혜定慧”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혜에 다 있고, 또 이 가르침이 우리 존재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부처님이 자신과 세상을 혜안으로 보는 눈하고 우리가 자신과 세상을 육안으로 보는 눈이 다르다 했지요? 자기 존재원리를 알면 객관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원리를 다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의 존재 원리는 하나입니다. 이것만 알면 불교를 다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연기緣起”, “중도中道”라 표현하는데, 이 「정혜품」 짤막한 글에 불교가 다 있습니다.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와 도교인, 재가자들과 여러 전생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聖人이 전하는 바이고, 혜능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들어 스스로 미혹한 것을 없애고 옛 사람들의 깨달음과 같기를 원하라.”

   혜능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보라.
   선지식아, 깨달음을 만나면 지혜를 이루리라.”

   혜능 스님이 금생의 인연으로 소주에 와서 법문하는 게 아니고, 전생에 오랫동안 인연이 있어서 이 땅에 왔고, 또 여러분과 함께 부처님 법을 얘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혜능 스님이 여기에서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는 바’라 한 것은 이 가르침은 “부처님과 역대 조사가 전한 것이지, 혜능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다”는 말이죠.
   옛 성인들에게 전해 받았다고 해서 없는 것을 전해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 존재원리가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 선사 스님이나 선사 부처님이나 우리나 그 존재원리는 손톱만큼도 틀림이 없어요. 똑같습니다. 이 발견은 참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위대한 원리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늘 남과 비교하며 자기를 학대하고 못살게 굴어 그걸로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들기도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몸짱’, ‘얼짱’ 하지요? 또, “앞집은 그랜저인데, 왜 우리 집은 티코냐?” “앞집은 서울대 학생인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하면서, 자기만 구박하면 되는데 비교하며 가족이나 이웃 사람까지 구박하고 있지요?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우리 각자 자기와 남을 얼마나 학대하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나와 남을 알게 모르게 학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덕이본 <육조단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나의 허물을 보라.”

   얼마 전에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했지요? 그 때 ‘아, 저걸 우리가 해야 하는데 천주교한테 뺏겼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천주교 사람들은 더 발전시키지 못해요. 발전시킬 만한 논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에는 이것을 심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르침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남이 나를 해치면, 나는 화를 내고 더 심하면 상대편을 증오하고 욕합니다. 그런데 내가 화를 내고 증오심을 일으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이 아니라 내 허물이라는 거죠. 다른 사람이 악의로 동기를 유발한 것은 당연히 그 사람의 허물입니다. 남을 화나게 만든 그 사람도 사실은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러든 말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 책임이 됩니다. 내가 안 받아들이면 되는데, 남의 허물을 받아들여 내가 화를 내고 미운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은 또 내 허물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곧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는 겁니다. 양변을 여읜 우리 존재원리를 제대로 알면, 앞에서 말했듯이 부처님같이 화가 안 나야 합니다. 도리어 화나게 한 사람을 연민해야 합니다. 연민하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지요. 맛있는 것 먹여 주고, 좋은 옷 입혀 주고, 좋은 데 가서 구경시켜 주고 하는 게 자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자기가 보호하는 이것이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어릴 때 어른들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자기 집에 기르는 강아지도 주인이 배를 툭툭 차면 동네 사람들도 같이 발로 찬대요. 그렇듯이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학대하면 다른 사람도 깔보고 학대하게 됩니다.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들더라도, 나는 나를 스스로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도 나를 사랑해줍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자기를 스스로 학대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든다고 같이 화를 내면서 욕하고 혈압을 올려 스스로 건강도 해치고 업도 같이 짓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 어떤 분은 가슴을 치며 “억울하게 살아왔다”고 우는 이도 있습니다. 그 동안 자기 자신이 모르고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절대 남을 해치지 않고 남도 사랑하게 됩니다. 또 남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와 남이 함께 이익이 되는 그런 사랑을 가르칩니다.

“가르침은 옛 성인聖人이 전하는 바이고, 혜능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들어 스스로 미혹한 것을 없애고 옛 사람들의 깨달음과 같기를 원하라.”
   양변을 여의어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그 자체가 미혹한 것을 없애는 겁니다.
   “옛 사람들의 깨달음과 같기를 원해라.” 양변만 여의면 그렇게 되는데 양변을 여의는 것이 실제로 어렵지요. 어렵다고 우리가 존재원리대로 돌아가지 않고 양변에서 자기를 학대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그걸 체험하기가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해만이라도 해야 합니다.

혜능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보라.”

   혜능 스님이 말하듯이 지혜는 본래 스스로 있는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준 것도 아니고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본래 있어요. 있는 대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 있다는 것이 뭐냐? 아까 말한 양변을 여읜 자리입니다. 우리는 형상화되어 있는 것만 보면서 있다고 집착합니다. 더 깊이 보아 그 현상이 “연기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다”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짚으로 가마니도 만들고, 짚신, 덕석도 만들지요. 제품만 보면 거기에는 크고 작은 것도 있고, 또 사람에 따라서 용도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그렇지요. 그러나 그 제품의 재료가 모두 짚이라는 것을 알면 제품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우리 인간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지만, 이렇게 형상지어 있어도 얼굴이나 모습이 모두 다르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가마니, 짚신, 새끼라고 합시다. 우리가 이 형상을 만들고 있는 짚, 그것만 보면 비교하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우열도 없고 거기에는 고하도 없고 귀천도 없고 다 평등합니다.

   그럼 짚은 뭡니까? 이것만 보면 견성見性이에요. 견성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짚은 뭐냐? 간혹 ‘마음이다, 부처다, 불성이다’ 얘기하는데 이것은 틀린 소리예요.

   저를 보고 그래요. “스님 강의 테이프를 듣고 있으면 젊은 스님으로 알았는데, 실제 와서 보니까 굉장히 노스님이네요!” 이름 듣고 추측하여 아는 것은 아는 게 아니에요. ‘마음이다’, ‘불성이다’, ‘본분자리다’ 이름은 많지요. 그러나 추측하는 걸로 봤다고 할 수 없어요.

   그러면 우리의 짚은 뭐냐? 이걸 아는 게 견성입니다. 이걸 알면, 진짜 우리는 해방하는 겁니다. 그 해방하고 해탈하는 그 위대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금강경> 같은 데는 “갠지스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보배를 보시하더라도, 이것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 공덕이 못 미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짚은 뭡니까? 간단하잖아요. 지금 형상지어진 게 있지요. 모양 말고 이걸 만든 짚이 있다고 하니, 그게 뭐냐? 그것만 알면 정혜定慧를 다 알고 우리 존재원리를 다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끄달리고 지배받고 고통을 느끼고 불만, 불평 느끼는 이런 것들이 일시에 없어진다는 거예요. 이걸 아는 것이 흐린 날 허공에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아요. 이걸 알면 구름이 걷히면서 햇빛이 비친다는 거예요. 이게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그런데 이름 가지고 모릅니다. 짚을 아는 것은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아요. 구름 걷히면 햇빛이 비치는 겁니다. 직접 가서 봐야 됩니다. 구름이 걷히면 우리 마음 속에 해가 나와요. 그 해가 보리반야지菩提般若智입니다.

“선지식아, 깨달음을 만나면 지혜를 이루리라.”
   깨달음을 만난다는 것은 “구름이 걷히면 햇빛이 나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제 정혜가 나옵니다. <육조단경>에서 귀중한 대목입니다. 이것만 이해하면 불교를 다 아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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