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수神秀(1)
  
신수 상좌가 생각하되, ‘모든 사람이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敎授師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마음의 게를 바치지 않으면 오조 스님께서 어떻게 나의 견해가 깊고 얕음을 알 것인가?
   내가 오조 스님에게 마음의 게송을 지어 뜻을 밝혀 법을 구하는 것은 옳거니와 조사祖師의 위치를 넘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범부의 마음으로 성인의 위치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아니하면 마침내 법을 얻지 못한다.
   침묵하며 생각하고 생각하되 참으로 어렵고 어려우며, 실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밤이 삼경三更에 이르면 사람들이 보지 않으니 남쪽 회랑 중간 벽에 마음의 게를 써놓고 법을 구해 보아야겠다. 만약 오조 스님이 게를 보시고 이 게가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나를 찾으면 내가 전생 업장이 두터워 법을 얻지 못함이니, 성인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내 마음을 스스로 쉬어야 하겠다.’

   당시 도량에 있던 대중이 아무도 게송을 바치지 아니했지요. 안 바치는 이유는 신수 상좌가 교수사가 되어 있으니 상좌가 알아서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지요. 그러니 신수 스님은 굉장히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밤 삼경이 되면 사람들이 아무도 안 보니, 남쪽 회량 벽에다 게를 써 두고 법을 구해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만약, 신수 상좌가 자신이 있었다면 남들이 보는 대낮에 떳떳이 오조 스님에게 게송을 바칠 텐데, 자신이 없으니까 남들이 안 볼 때 글을 써놓아 요행히 스님이 인정하면 내가 법을 잇고, 인정을 안 하면 그만두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요. 요행을 바라고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아예 안 쓰는 것이 옳습니다. 안 쓰려니까 또 대중 보기가 민망했겠지요. 대중이 다 자기만 쳐다보고 있으니 굉장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어요.
  
신수 상좌가 밤 삼경에 촛불을 들고 남쪽 회랑 중간 벽에 게송을 쓰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언제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이 있지 않게 하라.

   여기에서 이 게송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여기에는 먼지가 있고, 또 먼지를 없애는 행위도 하지요? 또 먼지가 끼지 않게 하는 노력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행하는 내용이지요? 먼지를 털고 닦고 하니까 수행하는 과정이지요. 그러니 이것을 손가락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조 스님은 수행하는 방법을 써오라 한 게 아니고 깨달음을 쓰라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불합격입니다. 그런데 신수 스님은 이거라도 안 쓸 수가 없지요. 자기도 알지요. 아니까 남몰래 벽에다 썼겠지요.

   자주 비유하는 말인데 ‘손가락과 달’입니다.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봐야 하지요. 오조 홍인 스님은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요구한 겁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라고 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보더라도 이것은 불합격입니다.

   이런 대목에서도 왜 불합격인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정견正見을 갖춰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자꾸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정견을 갖추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말하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우리 한국 도인 가운데 조사 스님들이 지은 깨달음에 대한 게송을 손가락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신수 스님과 같은 안목을 드러내는 거예요. 도인으로는 불합격이에요. 달을 이야기한 게송을 손가락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런 분들은 대중에게 바른 안목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혼란을 줍니다.

   이런 것이 정견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합니다. 제대로 깊이 수행하려면 적어도 달과 손가락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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