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게송을 지으라 이르심(命偈)(2)
  
문인들이 지시를 받고 각자 방으로 돌아 와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름지기 마음을 가다듬고 뜻으로 게송을 지어 스님께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神秀 상좌가 교수사이니, 법을 얻은 후에 자연히 의지하면 되니까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쉬고 다들 감히 게송을 짓지 않았다.

   그 때에 오조 스님의 방 앞에 세 칸의 회랑이 있어 그 회랑 벽에 <능가변상도>와 오조 스님이 가사와 법을 전수하는 그림을 그려 공양해서 후대에 유행시켜 기념하고자 화인 노진9)에게 벽을 살피게 하여 다음날 시작하려 했다.

   그러니까 오조 홍인 스님의 지시를 받은 대중들은 자기 방에 돌아와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신수 스님이 우리 대중에서는 최고 수좌이니, 우리가 게송을 지어 바쳐봤자 합격도 못할 것이다. 신수 스님이 게송을 지어 법 받는 것은 당연하니, 그 분이 법을 받은 후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수 스님을 의지해서 공부하면 된다. 그래서 골치 썩어가면서 게송을 지으려고 끙끙거릴 게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능가변상도>가 나오지요? 변상도變相圖 라는 것은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말합니다. 『법화경』은 『법화경』대로 변상도가 있고, 『화엄경』은 『화엄경』대로 변상도가 있습니다. 오조 스님이 5대 때까지 법을 전하는 그림을 그려서 그렇게 법이 전해 내려 왔다는 것을 기념하려고 회랑 벽에다 그리려 했던 것이죠.

   이 대목에서 신수(神秀 606~706) 상좌가 나오는데요. 신수 스님은 육조 혜능(638~713) 스님보다는 한 서른 살이나 나이가 많은 분입니다. 오조 홍인(594~674) 스님과는 십여 살 정도 차이가 나니 오히려 나이 차이가 별로 없어요. 신수 스님도 어릴 때 출가해서 유가의 사서삼경이나 장자라든지 당시 학문을 많이 하였답니다. 한 마디로 굉장히 유식한 분이죠. 오조 스님이 열반 이후에는 당시 서울인 장안(서안) 등 북방에서 법을 널리 펴셨고, 육조 혜능 스님은 주로 남방에서 법을 펴셨지요. 법으로 보면 육조 스님이 돈오頓悟법을 제창하셨고, 신수 스님은 점수漸修법을 가르쳐 후대 선문禪門에서 비판을 받게 되고 제자들이 많지 않아 쇠퇴하였습니다.

   이 분이 40세 무렵에 오조 홍인 스님에게 와서 6년을 공부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신수 스님은 키도 8척이나 되고 인물이 아주 좋았답니다. 그런데, 육조 스님은 남쪽 변방 분으로 키도 작고 아주 인물도 못생기고 그랬다고 합니다. 나중에 육조 스님의 이름이 알려져 여황제 측천무후가 궁으로 초대했을 때 이 분이 병이 들어 못 간다는 구실을 댔는데, 어느 기록에는 인물이 못 생겨서 안 가겠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럴 정도로 신수 스님은 육조 스님과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신수 스님은 8척이나 되고 인물이 그렇게 잘 생겼대요. 그리고, 또 삼제 즉 세 황제의 국사國師가 됩니다. 그리고 낙양, 장안 하는 두 서울의 법주法主가 될 정도로 육조 스님보다 화려하게 살았던 분입니다. 그러나, 신수 스님은 법이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제자가 좋은 분들이 없어서 그런지 3~4대에 가면 그 법맥이 흐지부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육조 혜능 스님은 남방의 광주에서나 겨우 이름이 알려진 정도였으나 법이 높아서 그랬겠지만, 10대 제자를 두었고 또, 그 밑으로 굉장한 법손이 출현합니다. 가령 남악 회양(677~744)과 그 제자인 마조 도일(709~788) 스님도 굉장한 분이었죠. 문하에 80인의 대선지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조 도일 스님으로부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하는 백장, 황벽, 임제 이렇게 해서 가지가 벌어지면서 사실은 육조 스님 당대의 활동보다 그 제자들이 육조 스님의 돈법頓法을 굉장히 부각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실제 그 당대에는 신수 스님이 화려하게 권승權僧으로서 대접을 받으면서 3대 황제의 국사가 되었으니까 굉장하였습니다. 이 『육조단경』에는 신수 스님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나오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어요.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