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게송을 지으라 이르심(命偈)(1)
  
오조 홍인 스님이 하루는 문인門人들을 다 불러 모이게 하시고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세상 사람의 생사生死가 큰일인데, 너희 문인들은 종일 공양해서 다만 복전福田만 구하고 생사 고해苦海를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구나!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그 복의 문이 어찌 너희를 구하겠느냐?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잘 살펴보아라. 지혜가 있는 자는 스스로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써서 각자 게송 하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大意)을 깨달은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해서 육조로 삼을 것이니 어서 빨리 서두르도록 하라.’

   하루는 오조 홍인스님이 당시 도량에서 공부하던 문인 700명을 다 불러 모아 말씀하셨답니다. 세상에 생사의 일이 아주 큰데, 이 생사 일을 해결 안 하고 전부 복전만 구하고, 생사고해를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경책하십니다. 그 당시도 복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실 복도 나쁜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부처님을 복福·혜慧가 구족하신 양족존兩足尊이라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갖고 계시는 복은 남을 헤치지도 않고 자기를 헤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도움이 되고 남에게도 도움을 주는 청정하고 정당한 복福입니다.
   닦고 갖추는 과정도 양변을 여읜 청정한 방법이어서 모든 중생에게 회향해도 줄지 않는 대복전大福田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단지, 복만 구하고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를 벗어나기를 구하지 않는다는 경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사生死라 하면, 죽고 사는 것만이 생사라 이해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을 일으켰다, 사라졌다 이렇게 하고 있지요? 이것도 생사입니다. 꼭 무슨 수명이 다 되어 죽고 태어나고 이런 것만이 생사가 아니에요. 그것도 생사지만 우리가 지금 생각을 일으키고 사라지고 하는 이것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러면, 생각이 일어나고 꺼지고 하는 것이 생사인데, 도인道人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요. 그런데 도인은 생사라 안 그러고, 왜 우리만 이것을 생사라 하느냐?

   우리는 있다-없다, 너다-나다 하는 분별하는 마음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꺼졌다 하기 때문에 생사라 하고, 도인은 너다-나다, 있다-없다 이것을 초월해 있는 청정한 마음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생사라 안 합니다. 그 차이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도인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더라도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하는 것을 초월했기 때문에 경계에 끄달리지도 지배받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보면 환희심이 일어나고, 나쁜 일이 있으면 기분 나빠하는 것이 바로 경계에 끄달리며 지배받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우리는 그런 분별심으로 좋다-나쁘다 하는 이원적인 사고를 하면서 일어났다-꺼졌다, 꺼졌다-일어났다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계에 끄달리고 지배받고 자기를 학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도인과 중생의 차이는 경계에 끄달렸다, 안 끄달렸다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도인과 우리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견이 나서 “알았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생사심이 끊겨야 그것이 진짜 안 것이고 깨달은 것인데, 생사심이 남아 있으면서 알음알이로 살피고 아는 것 가지고, 자기가 도인이라고 설치지만 절대로 언행일치言行一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죄는 불통참회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취모검吹毛劍이라 합니다. 생사심을 끊는 칼이다. 화두가 참선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듯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없이 봉사를 하면 그것도 화두와 똑같습니다. 생사심을 바로 끊어버립니다. 상 없이 하면 그렇게 됩니다. 염불을 하더라도 “염도염궁念到念窮 무념처無念處”에 이르면, 생사심이 끊깁니다. 이것을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다는 말로도 표현하는데, 불교는 어떤 수행을 하든지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는 것을 구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면 염불하는 세계, 참선하는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생사심을 죽고 사는 그것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을 일으키고 사라지고, 사라졌다 일으켰다 하는 것이 생사심입니다. 또, 이것을 초월하는 것이 견성이고,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생사 고해苦海를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구나!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여기에서 미혹하다는 말은 이원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너다-나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이 미혹한 거예요.

  ‘그 복의 문이 어찌 너희를 구하겠느냐?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잘 살펴보아라. 지혜가 있는 자는 스스로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써서 각자 게송 하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大意)을 깨달은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해서 육조로 삼을 것이니 어서 빨리 서두르도록 하라.’

   생사라는 괴로움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고 복만 지으려 하지만, 그 복이 어찌 너희를 구하겠느냐 하고 경책하시며, 그 생사심을 끊는 것이 결국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고, 그 자체가 반야이고, 해탈입니다.

   그러니까 중생이나 도인이나 마음이 일어났다-꺼졌다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있다-없다를 바탕으로 분별심을 내어 대립과 갈등을 멈추지 못하며, 도인은 왜 생각을 하는데 분별심을 내지 않느냐? 그것은 간단합니다.

   『반야심경』에 “오온 개공五蘊 皆空”이라 하지요.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입니다. 여기서 “모두 공(皆空)”인 줄 알면, 내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정신과 육체에 실체가 없고, 연기緣起 현상이고,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 본래 모습입니다. 본래 그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렇게 존재하는데, 다만 착각에 빠져 그 효능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본래 모습,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수행을 꾸준히 하다 보면, 궁극에서도 자유자재하고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어 기쁜 세계이지만, 중간과정도 굉장히 깊은 행복감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불교 수행은 고행苦行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고행이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이 수행의 중간과정도 간 것만큼 자유를 누리고, 간 것만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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