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스승을 찾아감(尋師)(1)
  
혜능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 善知識아,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대사는 말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침묵하시다가 다시 말하되,
   “선지식 善知識아, 조용히 들어라. 혜능의 아버지는 본관이 범양이다. 아버지가 좌천해서 영남의 신주 백성으로 옮겨 살았다. 혜능이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노모와 외로운 아들이 남해로 옮겨와 가난으로 고생하면서 시장에 나무를 팔고 살았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무를 사서 혜능으로 하여금 숙소에 이르게 해서 나무를 주고 돈을 받아 문을 나서다가 문득 한 손님이 『금강경』 읽는 것을 보았다. 혜능이 한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지고 문득 깨달아 곧바로 그 손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셨는데 이 경전을 읽고 계십니까?’
   손님이 답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 동쪽 빙무산에서 오조 홍인 스님에게 예배하였는데 지금 그 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있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대사께서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을 가지고 읽으면 바로 자성을 보아 부처가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혜능이 그 말을 듣고 전생前生의 업연業緣이 있어서 곧 어머니와 인사하고 황매현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 스님에게 예배하였다.”

   “선지식善知識아,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여기서 깨끗한 마음이 뭘까요? 여기에 종지宗旨가 담겨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이라 할 때 우리는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그런 깨끗한 마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흔히 우리는 ‘깨끗하다’ 하면 ‘더럽다’, ‘더럽다’ 하면 ‘깨끗하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깨끗한 마음이 안 됩니다. 과연 깨끗한 마음이 무엇일까요? 사실은 이 말에 불교佛敎가 다 들어 있습니다. ‘깨끗하다 - 더럽다’, ‘나다 - 너다’, ‘옳다 - 그르다’, ‘있다 - 없다’ 하는 양변兩邊을 초월한 것이 깨끗한 마음입니다. ‘깨끗하다 - 더럽다’ 하는 상대적인 깨끗한 것은 깨끗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초월한 마음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그 깨끗한 마음을 우리 마음 속에 실현하는 것이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입니다.

   그런데 육조 스님은 도道를 통한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이렇게 쉽게 얘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게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뒤에 나오지만, 이 깨끗한 마음이 우리 본래 모습입니다. 절대로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본래 깨끗하다는 겁니다. 본래 우리는 그렇게 생겨져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 깨끗한 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착각에 빠져 ‘깨끗하다 - 더럽다’에 집착해서 완전히 양변에 구속되어서 거기에 끄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극히 일부입니다만, 율律에 엄격한 분들이 간혹 도반들이 계를 안 지키면, 그 스님을 무시하고 더러운 사람 보는 것 같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끗하다는 망상妄想에 집착한 사람이지 진짜 깨끗한 것은 못 본 사람입니다. 이걸 초기불교에서는 계금취戒禁取라고 합니다.

   이 깨끗한 마음이 우리 본래 모습이고 이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단경을 기록하는 목적이 종지宗旨를  계승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깨끗한 마음이 되어야 종지宗旨를 계승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깨끗하다는 마음이 ‘더럽다 - 깨끗하다’ 상대되는 깨끗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강조하겠지만, 결국은 이 깨끗한 마음을 알려면 연기緣起·중도中道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번 강의에서 저는 욕먹을 각오로 혜능 스님의 고차원 세계의 『육조단경』 강의를 좀 쉽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여러 사람이 『육조단경』을 통해서 정견正見을 이해하고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입니다. 그래서 거듭 강조하지만, 이 깨끗한 마음부터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깨끗하다 - 더럽다’ 하는 그 깨끗함은 절대로 아닙니다. ‘깨끗하다 - 더럽다’를 초월한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부처님이 발견한 법法, 또한 조사선祖師禪에서 말하는 법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사는 말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침묵하시다가 이에 말하되, ‘선지식아, 조용하게 들어라’”

   여기서도 ‘깨끗이, 조용한’ 이런 말이 또 나옵니다. 계속 나옵니다.  이것도 ‘시끄럽다 - 조용하다’의 상대적인 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끄럽다 - 조용하다’, ‘깨끗하다 - 더럽다’, ‘나다 - 너다’, ‘선이다 - 악이다’ 계속 이원二元적인 사고思考를 합니다. 이게 문제예요. 이것이 우리를 굉장히 괴롭힙니다. 그런 이원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에 남과 비교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굉장히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용히 들어라’ 말한 것을 아무 소리 안 나는 것이 조용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왁자지껄한 시장에 있어도 조용할 수 있습니다. 또 저 높은 산에 올라가 바람 하나 안 불고, 낙엽 하나 안 떨어지는 조용한 곳에 앉아 있어도 시끄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조용하다 - 시끄럽다’ 양변에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가 있든지 시끄럽게 듣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시장 바닥에 왁자지껄하는 가운데 있더라도 ‘시끄럽다 - 조용하다’의 양변을 여읜 사람은 24시간 어디에 있거나 시간 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조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깨끗이’, ‘조용한’ 이런 말 하나 하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육조께서는 물론 듣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해하고 들으라는 설명은 안 했지만, 그런 의도가 여기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조용하게 들어라, 이 말은 양변을 여읜 그런 조용함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혜능의 아버지는 본관이 범양이다. 아버지가 좌천해서 영남의 신주로 옮겨 살다가 혜능이 어려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노모와 외로운 아들은 다시 남해로 옮겨와 살았는데 가난하여 시장에 나무를 팔고 살았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무를 사니 혜능이 숙소까지 나무를 날라다 주고 돈을 받아 나오려다가 『금강경』 읽는 것을 보고 혜능이 한번 들음에 문득 마음이 밝아지고 깨달아 그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는데 이 경전을 읽고 계십니까?’”

   혜능 스님의 아버지는 본래 북경 근처의 범양 사람이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뭔가 실수를 해서 좌천되어 영남의 신주로 이주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영남 신주는 지금 중국의 남쪽 광동성에 있습니다. 지금 중국의 육조 스님 유적지에 가면 국은사國恩寺라는 절이 있어요. 육조 스님의 아버지, 어머니 묘가 있는 절입니다. 그 국은사가 신주에 있습니다.

   육조 스님은 어려서 아버님을 여의어 가난하게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루는 나무를 팔고 돈을 받아 문을 나오는데, 홀연히 한 손님이 『금강경』 읽는 것을 듣고 마음이 문득 밝아지고 뭔가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때까지는 육조 스님이 불교를 몰랐을 때입니다.

   “손님이 답하기를 ‘내가 기주 황매현 동쪽 빙무산에서 오조 홍인 스님에게 예배하니 지금 그 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대사께서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을 가지고 읽으면 바로 자성을 보아 부처가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손님은 황매현 동쪽 빙무산에서 왔는데 그 곳 오조 홍인 스님에게 불법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황매현 빙무산은 양자강 부근인데 지금은 그 산 이름이 쌍봉산입니다. 쌍봉산 서쪽에는 사조사四祖寺가 있고, 남쪽에 오조사五祖寺가 있는데 거기를 말합니다. 사조사도 굉장히 큽니다. 이 오조사도 기록에 보면 육조 스님이 “699명은 불법을 알았고 한 명만 불법을 몰랐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들으면 거꾸로 표현을 하는데 어쨌든 숫자는 700명이 거주했다는 말인데, 가보니까 그렇게 크지 않아요. 그 밑에 마을까지 절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렇게 크지 않더라고요. 그 절에 오조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저도 오조 스님의 등신불이 있다는 것을 중국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금강경』을 읽고 있던 손님이 하는 말이 오조 스님이 대중들에게 “『금강경』만 읽으면 견성할 수 있다”고 권하는 것을 보았다는 겁니다. 오조 스님 이전에는 『능가경』을 달마 스님으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합니다. 『금강경』은 공空사상이고, 『능가경』은 여래장如來藏사상이지요. 이런 것을 보면 오조 스님 대에 와서 공사상의 『금강경』을 중시하는 것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자료에는 이 손님이 『금강경』의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을 들었다고 하는데, 이 돈황본에는 그냥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들었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혜능이 그 말을 듣고 전생前生의 업연業緣이 있어서 곧 어머니와 인사하고 황매현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 스님에게 예배하였다.”

   여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 육조 스님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고생하면서 시장에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잘 봉양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큰 가치로 봤었습니다. 여기도 유교사회니까 부모에게 효도孝道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일이다 생각하고 다른 생각 없이 어머니 방 따뜻하게 해드리고, 음식 잘 해드리고, 오직 그것이 살아가는 가치로 알고 그런 가치 있는 일을 하니까 고단한 줄 모르고 잘 살아왔던 겁니다.

   지금 사람들처럼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칭찬 듣기 위해, 그런 다른 이해관계로 효도孝道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이고, 또 당시 유교사회에서는 효孝가 가장 으뜸되는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게 순수한 마음에서 효孝를 했던 겁니다.

   불교에서도 과거 일곱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七佛通偈]이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스스로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불교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합니다. 어쨌든 효孝하는 것도 좋은 일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니까 자정기의自淨其意가 되었던 겁니다. 이미 그런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이 『금강경』을 듣고 깨달아 버린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깨달았다’는 것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가야 합니다. 육조 스님이 출가 전에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견성성불한 그 깨달음이 아니고 지견知見으로 봐야 합니다. 확철대오해서 견성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분은 불교를 잘 몰랐지만  정말로 순수하게 효를 했기 때문에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을 듣고 지견知見이 났던 것입니다. 지견이 나니까, 지견 안날 때하고  180도 다른 사고와 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이란 같은 말이라도 확철대오한 깨달음과 지견知見의 깨달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확철대오한 깨달음을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과 같은 바른 깨달음이라 하여 정각正覺,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른 깨달음[無上正等覺], 구경각究竟覺 등으로 표현합니다. 선에서는 이를 확철대오한 견성성불이라 하지요. 그래서 저는 확철대오한 깨달음과 지식知識의 중간을 지견知見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견知見에도 굉장히 높낮이가 있습니다. 이 지견도 바로 나면 자정기의自淨其意가 되어 그것만큼 행동과 말이 변화하면서 언행일치가 됩니다.

   육조 스님은 불교를 몰랐을 때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은 지견이 열린 것이고, 그 이후 출가하여 8개월 동안 방아 찧는 수행을 하다가 다시 오조 스님 방에 들어가 『금강경』을 듣고 확철대오의 정각正覺을 이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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