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열반경 제 21 권
   
  송대 사문 혜엄 등이 니원경에 의거하여 덧붙임
   
22.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③
   
  "또 선남자여, 범부들은 몸과 마음에 괴롬을 만나면 가지가지 나쁜 짓을 일으키고, 만일 몸에 병이 나거나 마음에 병이 생기면, 몸과 입과 뜻으로 여러 가지 나쁜 짓을 짓게 하고, 나쁜 짓을 지었으므로 세 갈래로 헤매면서 모든 고통을 갖추 받느니라. 왜냐 하면 범부들은 생각하는 지혜가 없는 까닭이니, 그러하여 가지가지의 누를 내는 것을 염루(念漏)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항상 생각하기를, 내가 지나간 수없는 겁 동안에 이 몸과 마음을 위하여 가지가지 나쁜 짓을 지었고, 그러한 인연으로 살고 죽는 데 헤매면서 3악도에서 모든 고통을 받았으며, 그리하여 3승의 바른 길을 멀어지게 하였다 하나니, 보살이 이런 나쁜 인연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내어, 모든 악을 버리고 선한 길로 가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어떤 임금이 네 마리의 독사를 한 상자에 담아 두고, 다른 이를 시켜 먹을 것을 주어 기르게 하며, 누울 적에나 일어날 적에 그 몸을 쓰다듬게 하되, 만일 어떤 독사라도 성을 내게 하면 법에 의지하여 사형하리라 하였다. 그 사람이 임금의 명령을 듣고는 무서운 생각을 내어 상자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임금은 다시 전다라 다섯 사람을 보내면서 칼을 빼어 들고 따라가라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전다라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더욱 빨리 달아났다. 그 때에 다섯 전다라는 나쁜 방편으로 들었던 칼을 숨기고 가만히 다른 사람을 보내어 거짓 친근한 척하면서 도로 가자고 달래었으나, 그  
   
 
[503 / 909] 쪽  
  사람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어떤 마을로 들어가서 숨으려 하였다. 그 마을에 들어가서 여러 집들을 살펴보았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여러 독이나 뒤주들은 아무것도 담긴 것이 없었다. 사람들도 만날 수 없고 물건도 얻을 수 없어서 그냥 땅바닥에 앉았더니, 공중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가엾다. 그대여, 이 마을은 비어서 사는 사람이 없고, 오늘밤에는 여섯 도둑이 올 터인데, 그대가 만일 그들과 마주치면 생명을 보전할 수 없으리니 그대는 어떻게 면하려는가.'
  그 때에 그 사람은 무서운 마음이 점점 더하여 그 마을에서 떠나가다가, 큰 강을 만났는데, 물살은 급하고 배도 떼도 없었다. 황망한 중에 여러 가지 풀과 나무를 꺾어다가 떼를 만들면서 다시 생각하였다.  
  '내가 만일 여기 있다가는 독사와 다섯 전다라와 거짓 친한 척하는 사람과 여섯 도둑에게 해를 당할 것이요, 만일 이 강을 건너려면 떼도 믿기 어려우니,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차라리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저 독사나 도둑의 피해를 입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나무로 만든 떼를 물 위에 밀어 넣고 그 위에 몸을 의지하여 손과 발을 허위적거리면서 강을 건너가 저 언덕에 이르니, 아무 걱정이 없고 마음이 태연하여 공포가 없어졌다.
  보살마하살이 이 대반열반경을 듣고 받아 지니면, 몸은 상자와 같고 지대·수대·화대·풍대는 네 마리의 독사와 같이 보나니, 보기도 독하고 건드리는 것도 독하고 기운도 독하고 물리는 것도 독한 것이다. 모든 중생이 이 네 가지 독을 만나므로 목숨을 잃게 되나니, 중생들의 4대도 그와 같아서, 보는 것도 나쁘고 건드림도 나쁘고 기운도 나쁘고 물리는 것도 나쁘며, 이런 인연으로 여러 선한 일을 여의게 되느니라.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독사에 네 가지 족성(族姓)이 있음을 관하나니, 찰리(刹利)·바라문(婆羅門)·비사(毗舍)·수타(首陀)니라. 4대라는 뱀도 그와 같아서 네 가지 성질이 있으니, 굳은[堅] 성질, 젖는[濕] 성질, 더운[熱] 성질, 동하는[動] 성질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4대가 네 마리의 독사와 성질이 같다고 보느니라.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4대를 네 마리의 독사와 같이 관하나니, 어떻
   
 
[504 / 909] 쪽  
  게 관하는가. 네 마리의 독사는 항상 사람의 짬을 엿보아 어느 때에 볼까, 어느 때에 건드릴까, 어느 때에 독기를 뿜을까, 어느 때에 물까 하나니, 4대의 독사도 그와 같아서 항상 중생의 짬을 엿보아 그 기회를 기다리느니라. 설사 네 마리 독사에게 물려 죽는대도 3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지만, 만일 4대의 살해를 받으면 반드시 3악도에 떨어질 것이 의심없느니라. 저 네 마리의 독사를 아무리 보살펴서 기른다 하더라도 항상 사람을 물려 하나니, 4대도 역시 그러하여 아무리 이바지하여도 사람을 이끌어 나쁜 업을 짓게 하느니라. 네 마리 독사 중 한 마리만 성내어도 사람을 죽이나니, 4대의 성품도 그와 같아서 1대만 발작하여도 사람을 해치느니라.
  이 네 마리 독사가 비록 한곳에 있어도 마음이 각각 다르듯이, 4대의 독사도 그와 같아서, 한곳에 있더라도 그 성품이 제각기 다르니라. 네 마리 독사를 아무리 공경하더라도 친근하기 어렵듯이, 4대의 독사도 그러하여, 비록 공경하더라도 친근하기 어려우니라. 저 네 마리 독사가 사람을 해칠 때에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주문과 약으로 치료할 수 있거니와, 4대의 독사가 사람을 해칠 때에는 사문이나 바라문의 주문이나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느니라. 마치 제물을 조심하는 사람이 네 마리 독사의 냄새가 나쁜 것을 맡고는 멀리 여의는 것과 같나니, 부처님과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4대의 냄새를 맡고는 멀리 여의느니라. 이 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4대의 독사는 매우 무서운 것이라 하고, 버려 두고 달아나서 8성도(聖道)를 닦았느니라.
  다섯 전다라란 것은 곧 5음이니, 어찌하여 보살이 5음 보기를 전다라와 같이 하는가. 전다라는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와 사랑은 이별하고 원수는 모이게 하나니, 5음도 그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나쁜 법은 탐하게 하고 선한 법은 여의게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전다라는 가지각색 무기로 스스로 무장하나니, 칼이나 방패나 활이나 살이나 갑옷이나 창 따위로 사람을 해치느니라. 5음도 그와 같아서 여러 가지 번뇌로 굳게 무장[裝束]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해쳐 생사에 떨어지게 하느니라. 선남자여, 전다라는 죄 지은 사람들을 해치나니, 5음도 그러하여 번뇌의 허물 있는 사람들을 해치느니라. 그러므로 보살들이 5음을 보기를 전다라와 같이 하느니라.
   
 
[505 / 909] 쪽  
  또 보살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다라와 같이 한다는 것은, 전다라는 자비한 마음이 없어서 원수나 친한 이를 모두 해치나니, 5음도 그와 같아서 자비한 마음이 없이 선과 악을 함께 해치느니라. 전다라가 모든 사람을 시끄럽게 하듯이, 5음도 그러하여 모든 번뇌로써 모든 생사하는 중생들을 시끄럽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보살들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다라와 같이 하느니라.
  또 보살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다라와 같이 한다는 것은, 전다라는 항상 해치려는 마음을 품나니, 5음도 그러하여 항상 모든 번뇌로 해치려는 마음을 품느니라. 마치 사람이 발이나 칼이나 작대기나 시종이 없으면, 전다라에게 살해될 줄을 알아야 하듯이, 중생도 그러하여 발도 없고 칼도 없고 시종도 없으면 5음의 해를 입게 되느니라. 발은 계행이요 칼은 지혜요 시종은 선지식이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5음의 해를 입게 되나니, 그러므로 보살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다라와 같이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보살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다라보다도 지나치게 하나니, 왜냐 하면 중생이 만일 다섯 전다라의 살해함이 되더라도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지만, 5음의 살해를 입으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이런 뜻으로 보살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다라보다 지나치게 한다는 것이니라. 이렇게 관찰하고는 서원을 세우되, 내가 종신토록 전다라를 가까이할지언정, 잠깐 동안만이라도 5음을 친근하지 못할 것이니, 전다라는 다만 욕계의 어리석은 사람만을 해치거니와, 5음은 삼계의 범부 중생을 모두 해치는 것이며, 전다라는 다만 죄 있는 사람만을 살해하거니와, 이 5음의 도둑은 중생들의 죄가 있고 죄가 없건 간에 모두 해치는 것이며, 전다라는 늙은 할머니나 어린아이들은 해치지 않지만 5음의 도둑은 중생의 늙은이, 어린이, 여자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해롭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5음을 보기를 전다라보다 지나치게 하며, 발원하기를 차라리 종신토록 전다라를 가까이할지언정, 잠시라도 5음을 친근하지 않겠다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전다라는 다른 사람만 해치고 자기는 해치지 않지만 5음의 도둑은 자기도 해치고 다른 이도 해치고 전다라도 해치느니라. 전다라는 좋은 말을 하거나 재물이나 보배를 주고 벗어날 수 있지만, 5음은 그렇지 아니하여 좋은 말로 달래거나 재물이나 보배를 주고 벗어날 수 없느니라. 전다라
   
 
[506 / 909] 쪽  
  는 네 시절을 두고 늘 살해하는 것 아니지만, 5음은 그렇지 아니하여 어느 때나 항상 중생을 해치느니라. 전다라는 한 곳에만 있으므로 도피할 수도 있지만, 5음은 그렇지 아니하여 간 데마다 있으므로 도피할 수가 없느니라. 전다라는 사람을 해치더라도 해친 뒤에는 따라오지 않거니와, 5음은 그렇지 아니하여 중생을 죽이고도 따라다니면서 떠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차라리 종신토록 전다라는 가까이할지언정, 잠시라도 5음을 친근하지는 않으려 하느니라.
  지혜 있는 사람은 좋은 방편으로 5음을 벗어날 수 있나니, 좋은 방편은 8성도와 6바라밀과 4무량심이니라. 이런 방편으로 해탈하면 몸과 마음이 5음의 해침을 받지 아니하나니, 왜냐 하면 몸은 금강과 같고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몸과 마음을 파괴하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이런 뜻으로 보살은 5음이 모든 선하지 못한 법을 성취함을 보고 두려운 생각을 내어 8성도를 닦나니, 마치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다라를 두려워하여 강을 건너가고 머물러 있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거짓 친근한 척하는 것은 탐애(貪愛)라 하느니라. 보살은 탐애의 번뇌를 원수같이 생각하나니, 만일 실정을 알면 어찌할 수 없거니와 만일 알지 못하면 반드시 해를 받느니라. 탐애도 그러하여 만일 그 성품을 알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에서 헤매게 하지 못하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여섯 갈래로 헤매면서 모든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왜냐 하면 탐애의 병을 버리기 어려움이, 마치 친한 척하는 원수를 멀리 떠나기 어려움과 같기 때문이니라. 친한 척하는 원수는 항상 짬을 엿보아서, 사랑하는 것은 이별하게 하고, 미워하는 것은 모이게 하나니, 탐애도 그와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선한 법은 멀리 여의게 하고 모든 선하지 못한 법을 가까이하게 하느니라. 이러한 이치로 보살마하살이 탐애를 보기를 원수가 거짓 친한 척함과 같이 하나니,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는 연고니라. 마치 범부가 생사의 허물을 보는 것 같아서, 비록 지혜가 있으나 어리석음이 가리운 탓으로 다시는 보지 못하나니, 성문과 연각도 그와 같아서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느니라. 그 까닭을 말하면 탐애하는 마음을 인한 탓이니, 왜냐 하면 생사의 허물을 보고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빨리 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507 / 909] 쪽  
  니라. 그런 뜻으로 보살마하살은 탐애의 번뇌를 친한 척하는 원수와 같이 보느니라.
  어떤 것을 이름하여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이라 하는가. 원수는 참이 아닌 것을 참인 듯이 나타내고 친근하지 못한 것을 친근한 듯이 나타내고 실로는 선하지 아니한 것을 선한 듯이 나타내며,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듯이 나타내나니, 왜냐 하면 항상 사람의 짬을 엿보아 해치려는 까닭이니라. 탐애도 그와 같아서 항상 중생을 위하여 참이 아닌 것을 참인 듯 꾸미고, 친근하지 아니한 것을 친근한 듯이 꾸미며, 선하지 아니한 것을 선한 듯이 꾸미고,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듯이 꾸미어서, 모든 중생들을 속여 생사에 바퀴돌 듯하게 하나니, 이러한 뜻으로 보살이 탐애를 보기를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과 같이 하느니라.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은, 몸과 입만 보고 마음을 보지 못하므로 능히 속이나니, 탐애도 그러하여 다만 허황할 뿐이요, 실상은 얻을 수 없으므로 모든 중생들을 의혹케 하느니라.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은 처음도 있고 나중도 있어 멀리 떠나 보낼 수도 있거니와, 탐애는 그렇지 아니하여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으므로 멀리 여의기 어려우니라. 원수가 친한 척함은 멀면 깨닫기 어렵고 가까우면 알기 쉽거니와, 탐애는 그렇지 아니하여 가까워도 알기 어렵거든, 하물며 멀면 알까보냐. 이런 이치로 보살이 탐애를 볼 때에 친한 척하는 원수보다는 지나치게 하느니라. 모든 중생들은 탐애하는 번뇌의 탓으로 대열반을 멀리하고 생사를 가까이하여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멀리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내가 없고 부정함을 가까이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여러 가지 경전에서 세 가지 때[三垢]라고 말하였으니, 현재의 일에는 무명 때문에 허물을 보지 못하여 여의지 못하거니와, 탐애의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으로는 마침내 지혜 있는 사람은 해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탐애를 보고 두려움을 내어 8성도를 닦나니, 마치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다라와 친한 척하는 이를 무서워하여 달아나고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빈 마을이라 함은, 곧 안으로 여섯 군데 받아들이는 것[內六入]이니 보살마하살이 이 6입(入)이 비어서 아무것도 없음을 보되, 빈 마을과 같이 여기
   
 
[508 / 909] 쪽  
  는 것은, 마치 저 무서워하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갔지만,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독이나 뒤주 따위를 살펴보았으나 한 물건도 찾지 못함과 같으니라. 보살도 그와 같아서, 6입을 관찰하였으나 비어서 아무것도 없고, 중생이나 한 물건도 실다운 것이 없으므로, 보살이 안의 6입이 비어서 아무것도 없음을 보되, 빈 마을과 같이 하느니라. 선남자여, 저 빈 마을을 도둑들이 멀리서 보고는 비었다는 생각을 내지 않나니, 범부들도 그러하여, 6입의 마을에 대하여 비었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비었다고 생각하지 못하므로 생사에서 바퀴돌 듯하면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느니라.
  선남자여, 도둑들이 마을에 들어가고는 빈 줄을 알 듯이, 보살도 그러하여 이 6입을 보고 비었다는 생각을 내며, 비었다고 생각하므로 생사에서 바퀴돌 듯하는 고통을 받지 아니하며, 보살마하살은 이 여섯 군데에 뒤바뀌지 아니하나니, 뒤바뀌지 아니하므로 다시 생사에서 바퀴돌 듯하지 아니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마치 도둑들이 빈 마을에 들어가서는 편안한 것같이 번뇌의 도둑도 그러하여 이 6입에 들어가면 안락하게 되는 것이며, 도둑이 빈 마을에 머무를 적에 두려운 마음이 없듯이, 번뇌의 도둑도 그러하여 6입에 머물면 두려움이 없느니라. 저 빈 마을에는 사자나 호랑이, 이리 따위의 영악한 짐승들이 사는 것처럼, 안의 6입도 그와 같아서, 온갖 나쁜 번뇌 짐승들이 머무나니, 그러므로 보살이 6입을 보되, 비어서 아무것도 없고, 순전히 선하지 못한 것들만이 머무는 데라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안의 6입이 비어서 아무것도 없음을 볼 때에, 빈 마을처럼 생각함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이 허황하여 참되지 못한 연고며, 아무것도 없는 데를 있다고 생각하는 연고며, 즐거울 것이 없음을 즐겁다고 생각하는 연고며, 사람이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연고니라. 안의 6입도 역시 그러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며, 즐거울 것이 없는 것을 즐겁다고 생각하며, 사람이 없는 것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거니와 지혜 있는 사람만이 분명히 알고 실지를 얻게 되느니라.
  또 선남자여, 빈 마을은 어떤 때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이 없기도 하지만, 6입은 그렇지 아니하여 한결같이 사람이 없나니, 왜냐 하면 성질이 항상 공한 까닭이니라. 지혜 있는 이가 알 것이요, 눈으로 볼 것이  
   
 
[509 / 909] 쪽  
  아니므로, 보살들은 안의 6입이 피해가 많음을 보고, 8성도를 닦아서 잠시도 쉬지 아니하나니, 마치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다라와 친한 척하는 사람과 여섯 도둑이 무서워서 바른 길로 달아나는 것과 같으니라.
  여섯 도둑이란 것은 밖에 있는 여섯 티끌[外六塵]을 말함이니, 보살마하살이 이 6진(塵)을 여섯 도둑처럼 보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온갖 선한 법을 빼앗은 연고니라. 여섯 도둑이 모든 사람의 재물을 빼앗듯이, 6진의 도둑도 그와 같아서, 온갖 중생의 선한 재물을 빼앗느니라. 마치 여섯 도둑이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있는 것은 좋건 나쁘건 모두 빼앗아 큰 부자라도 금시에 가난뱅이가 되게 하나니, 이 6진의 도둑도 그와 같아서, 사람의 근(根)에 들어가면 모든 선한 법을 빼앗으며, 선한 법이 다 없어지면, 가난하고 외로운 일천제(一闡提)가 되나니, 그러므로 보살이 6진을 보기를 여섯 도둑과 같이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여섯 도둑이 남의 재물을 빼앗으려 할 때에는 안에 있는 사람과 결탁하여야 하나니, 만일 안에 있는 사람이 없으면 문득 중도에 물러가느니라. 6진의 도둑도 그와 같아서, 선한 법을 빼앗으려면 안에 있는 중생의 지견인 항상하고[常] 즐겁고[樂] 나이고[我] 깨끗하여[淨] 공하지 않다는 모양을 연결하여야 하나니, 안에 만일 이런 모양이 없으면 6진의 나쁜 도둑이 모든 선한 법을 빼앗지 못하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안에 이런 모양이 없거니와, 범부에게는 있으므로 6진이 항상 와서 선한 법을 침노하는 것이며, 잘 수호하지 못하고 빼앗음을 받게 되느니라. 수호하는 것은 지혜라 하나니, 지혜 있는 사람은 잘 방비하고 수호하여서 빼앗음을 받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6진을 보기를 여섯 도둑과 같이 하여 차별이 없느니라.
  또 선남자여, 여섯 도둑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시끄럽게 하듯이, 6진도 그와 같아서, 중생의 몸과 마음을 항상 괴롭게 하느니라. 여섯 도둑은 사람의 현재 있는 재물만 빼앗거니와, 6진의 도둑은 중생들의 삼세의 선한 재물을 빼앗느니라. 여섯 도둑은 밤에는 즐거워하나니, 6진의 도둑도 그러하여 무명의 어두운 밤에는 즐거워하느니라. 여섯 도둑은 임금의 법으로만 막을 수 있듯이, 6진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막을 수 있느니라. 여섯 도둑이 재물을 빼앗을 때에는 단정한 가문이나 총명한 철인이나 많이 아는  
   
 
[510 / 909] 쪽  
  박사나 부유하고 빈천한 이를 가리지 아니하듯이, 6진의 도둑도 그와 같아서, 선한 법을 빼앗을 때에는 단정하거나 내지 빈천한 이를 가리지 않느니라. 여섯 도둑은 비록 왕의 법률로 그들의 손과 발을 끊을 수 있으나, 그들의 마음을 쉬게 할 수는 없나니, 6진의 도둑도 그와 같아서, 수다원이나 사다함이나 아나함들이 그 손과 발을 끊을 수는 있으나, 선한 법을 빼앗지 못하게는 할 수 없느니라. 용맹한 사람은 여섯 도둑을 굴복시킬 수 있듯이, 부처님과 보살들은 6진의 도둑을 꺾어 굴복시키느니라.
  마치 사람이 문벌이 흥왕하고 종족이 많으면 여섯 도둑의 빼앗음을 받지 아니할 수 있듯이, 중생들도 그러하여 선지식이 있으면 6진의 도둑의 빼앗음을 받지 않느니라. 여섯 도둑은 사람의 물건을 보고서야 훔치지만, 6진은 그렇지 아니하여 보거나 알거나 듣거나 맡거나 부딪치고 지각하는 것을 모두 빼앗느니라. 여섯 도둑은 욕계 사람의 재물만을 빼앗고, 색계나 무색계의 것은 빼앗지 못하거니와, 6진의 도둑은 그렇지 아니하여, 삼계의 온갖 선한 보배를 모두 빼앗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6진을 관찰할 때에 여섯 도둑보다 지나치게 하며, 그렇게 관찰하고는 8성도를 닦아서 바로 가고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마치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다라와 친한 척하는 사람과 여섯 도둑을 무서워하여 빈 마을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과 같으니라.
  길에서 강을 만났다 함은 번뇌를 말함이니, 어찌하여 보살이 번뇌 보기를 큰 강과 같이 하느냐. 물살이 급한 강물이 향상(香象)을 떠내려 보내듯이, 번뇌의 강물도 그러하여 연각도 떠내려 보내나니, 그러므로 보살이 번뇌 보기를 물살 급한 강물과 같이 하느니라. 깊어서 바닥을 알 수 없으므로 강이라 하고, 넓어서 가[邊]를 알 수 없으므로 크다 하며, 그 속에 나쁜 고기들이 많이 있나니, 번뇌의 강도 그러하여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바닥을 얻을 수 있으므로 깊다 하고,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가를 얻을 수 있으므로 크다 하고, 모든 어리석은 중생을 해치므로 나쁜 고기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번뇌 보기를 큰 강물처럼 하느니라. 마치 강물이 온갖 초목을 자라게 하듯이, 번뇌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이 25유(有)를 자라게 하나니, 그러므로 보살이 번뇌 보기를 큰 강과 같이 하느니라.
  마치 사람이 강물에 빠지면 부끄러움이 없듯이, 중생도 그러하여 번뇌의  
   
 
[511 / 909] 쪽  
  강에 빠지면 부끄러움이 없느니라. 강에 빠지는 사람은 바닥까지 이르지 못하고 목숨을 마치듯이, 번뇌의 강에 빠진 이도 그와 같아서, 밑바닥까지 이르지도 못하고 25유에 두루 돌아다니며 헤매느니라. 밑바닥이라 함은 공한 모양을 말함이니, 만일 공한 모양을 닦지 아니하면, 이 사람은 25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모든 중생들도 공하여 모양이 없는 것을 잘 닦지 못하므로, 번뇌의 강에 항상 빠져 있느니라. 강물은 몸만 빠지는 것이요, 모든 선한 법은 빠뜨리지 못하거니와 번뇌의 강은 그렇지 아니하여 몸과 마음의 모든 선한 법을 파괴하느니라. 빨리 흐르는 강물은 욕계의 사람만을 표류케 하지만, 번뇌의 강물은 삼계의 세간 사람, 천상 사람들까지 표류케 하느니라. 세간의 강에서는 손과 발을 움직이면 저 언덕에 이를 수 있지만 번뇌의 강에서는 보살만이 6바라밀을 말미암아서야 건너가는 것이니라.
  저 강물을 건나가기 어렵듯이, 번뇌의 강물도 그러하여 건너가기 어려우니, 어찌하여 건너기 어렵다 하는가. 10주(住)에 오른 대보살들도 끝까지 건너가지 못하고, 부처님만이 필경까지 건너가는 것이므로 어렵다는 것이니라. 사람이 강에 빠져서는 조그만 선한 법도 닦을 수 없나니 중생도 그러하여 번뇌의 강에 빠져서는 선한 법을 닦을 수 없느니라. 마치 사람이 강에 빠져서 물에 떠내려가는 것은, 기운 센 사람이면 건져낼 수도 있지만, 번뇌의 강에 빠져서 일천제가 된 사람은 성문·연각이나 부처님까지도 건져내지 못하느니라. 이 세상의 강물은 겁이 끝날 때에 일곱 태양이 한꺼번에 뜨면 마르기도 하지만 번뇌의 강물은 그렇지 아니하여, 성문이나 연각이 7각지(覺支)를 닦더라도 말리울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번뇌 보기를 물살 급한 강과 같이 하느니라.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다라와 친한 척하는 한 사람과 여섯 도둑이 무서워서 빈 마을을 버리고 빨리 가다가, 강가에 이르러서는 초목을 모아 떼를 만들 듯이, 보살도 그러하여 4대의 독사와 5음의 전다라와 친한 척하는 탐애와 6입의 빈 마을과 6진의 도둑이 무서워서 번뇌 강에 이르러서는, 계·정·혜·해탈·해탈지견과 6바라밀과 37도품(道品)을 닦아서 떼를 만들고, 이 떼를 의지하여 번뇌의 강을 건너서, 항상하고 즐거운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느니라.
보살로서 대반열반을 닦는 이는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이러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참지 못하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의 강을 건너게 하지 못하리라' 하며, 이렇게 생각하였으므로 비록 몸과 마음의 고통이 있더라도 잠자코 참으며, 참고 견디므로 누(漏)를 내지 아니하느니라. 보살도 이렇게 모든 누가 없거든, 하물며 부처님께서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님들은 누가 있다고 이름하지 않느니라.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무루가 아니라 하는가. 여래는 항상 유루 중에 있는 연고며, 유루는 곧 25유니 그러므로 성문이나 범부들은 부처님이 유루라고 말하거니와, 부처님 여래는 참으로 무루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인연으로 부처님 여래는 결정한 모양[定相]이 없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4중금(重禁)을 범하거나, 방등경을 비방하거나, 일천제들은 모두 결정된 것이 아니니라."
  이 때에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이렇게 아뢰었다.
  "그러하나이다. 거룩하신 말씀과 같사와 온갖 법은 모두 결정되지 않았으며,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여래께서도 필경의 열반에 들지 아니하심을 알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이 대반열반을 닦아서 듣지 못하던 것을 듣는 가운데는 열반이 있고 대열반이 있다 하셨사온데, 어떤 것을 열반이라 하오며, 어떤 것을 대열반이라 하나이까?"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을 찬탄하시었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여, 어떤 보살이든지 생각하는 총지[念摠持]를 얻어서야 그대가 묻는 바와 같이 물으리라. 선남자여,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가 있고 큰 바다가 있으며, 강과 큰 강이 있으며, 산과 큰 산과, 땅과 사람과 대인과 하늘과 하늘 중의 하늘[天中天]과 도(道)와 큰 도가 있다 하나니, 열반도 그와 같아서 열반도 있고 대열반도 있느니라.
  어떤 것을 열반이라 하는가. 선남자여,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밥을 조금만 먹어도 안락하다 하나니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 하며, 병이 나으면 안락하다 하나니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 하며, 어떤 사람이 공포를 느끼다가 의지할 데를 얻으면 안락을 얻었다 하나니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 하며, 가난하던 사람이 7보를 얻으면 안락을 얻었다 하나니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 하며, 사람이 뼈를 보고 탐욕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락을 얻나니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 하
   
 
[513 / 909] 쪽  
  거니와, 이러한 열반들은 대열반이라고 이름하지 못하느니라. 왜냐 하면 기갈하던 까닭이며 병 있던 까닭이며 공포하던 까닭이며 가난하던 까닭이며 탐욕을 내던 까닭이니, 열반이라 할지언정 대열반은 아니니라.
  선남자여, 범부나 성문들이 혹 세속을 인하거나 혹 성인의 도를 인하여 욕계의 속박을 끊으면 안락함을 얻나니, 이런 안락은 열반이라 이름할지언정 대열반이라 이름하지 못하느니라. 초선의 속박을 끊거나 내지 비상비비상처의 속박을 끊으면 안락함을 얻나니, 이런 안락은 열반이라 이름할지언정 대열반이라 이름하지는 못하느니라. 왜냐 하면 도로 번뇌를 내거나, 습기(習氣)가 있는 까닭이니라. 어떤 것을 번뇌의 습기라 하는가. 성문이나 연각은 번뇌의 습기가 있나니, 이른바 나의 몸이라, 나의 옷이라, 내가 간다, 내가 온다, 내가 말한다, 내가 듣는다, 여래는 열반에 들었다, 열반의 성품은 내가 없고 즐거움이 없고 다만 항상하고 깨끗함만 있다고 하는 등 이것을 번뇌의 습기라 이름하느니라.
  부처와 교법과 스님들은 차별한 모양이 있고, 여래는 필경의 열반에 드시며, 성문이나 연각이나 부처님의 얻는 열반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하나니, 이런 뜻으로 2승의 얻는 열반은 대열반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이 없는 까닭이니,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여야 대열반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어떤 곳에서 여러 강물을 받아들이는 데가 있으면 큰 바다라고 이름하듯이,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이나 부처님 여래의 들어가시는 데를 대열반이라 이름하나니, 4선정·3삼매·8배사(背捨)·8승처(勝處)·10일체처(一切處) 따위의 한량없는 선한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강이 있는데 첫째가는 향상(香象)으로도 바닥에 닿지 못한다면 큰 강이라 이름하듯이 성문·연각이나 10주 보살까지가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열반이라 할지언정 대열반은 아닌데, 만일 불성을 분명하게 본다면 대열반이라 이름하느니라. 이 대열반은 큰 코끼리왕이라야 바닥을 밟을 수 있나니, 큰 코끼리왕은 부처님을 말함이니라. 선남자여, 마하나가(摩訶那伽)나 발건타(鉢犍陁) 대역사들이 오랜 세월을 걸어도 올라갈 수 없는 것
   
 
[514 / 909] 쪽  
  을 큰 산이라 하듯이, 성문·연각이나 보살인 마하나가나 대역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라야 대열반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소왕(小王)이 있는 데는 작은 성이라 하고, 전륜왕이 있는 데는 큰 성이라 하듯이, 성문이나 연각이 8만·6만·4만·2만·1만 겁 동안 머무는 데는 열반이라 하고, 위없는 법주(法主)인 성왕(聖王)의 머무는 데라야 대반열반이라 이름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대반열반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네 가지 군대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큰 중생이라 이름하리니, 만일 어떤 중생이 3악도의 번뇌와 나쁜 업에 대하여 두려움을 내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중생을 널리 제도한다면 이 사람은 대열반을 얻을 것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부모를 공양하며 사문이나 바라문을 공경하고 선한 법을 닦으며 말이 진실하여 속이지 아니하며, 나쁜 것을 참고 가난한 이를 도와주면 대장부라 이름하리니, 보살도 그러하여 대자비가 있어 모든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여러 중생을 부모같이 여기며, 생사하는 바다에서 중생들을 건지고, 중생들에게 한결같은 실상의 도를 보여 준다면 그런 이는 대반열반이라 이름할 것이니라.
  선남자여, 크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음[不可思議]을 말함이니, 만일 헤아릴 수 없어서 중생들이 믿을 수 없으면 대반열반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보는 것이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슨 인연으로 대(大)라 하는가. 한량없는 인연으로써 얻을 수 있으므로 대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세상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은 것을 대라 하나니, 열반도 그러하여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는 것이므로 대라 하느니라. 어찌하여 다시 대열반이라 이름하는가. 큰 나[大我]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열반에는 내가 없지만 크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크게 자재하다 하는가. 여덟 가지 자재가 있으므로 나라 하나니, 무엇이 여덟인가. 첫째는 한 몸으로 여러 몸을 나타내는데, 몸의 크기가 티끌과 같아서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가득하며, 여래의 몸은 티끌이 아니지만, 자재하므로 티끌 같은 몸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 하느니라. 둘째는 한 티끌 같은 몸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나니, 여래의 몸은 실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것 아니지만 걸림이 없는 까닭이며, 자
   
 
[515 / 909] 쪽  
  재함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는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 하느니라.
  셋째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몸으로 훨훨 날아서 20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세계를 지나가도 장애가 없느니라. 여래의 몸은 가볍고 무거움이 없건만 자재한 연고로 가볍기도 무겁기도 한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 하느니라. 넷째는 자재한 연고로 자재하게 되나니 어떻게 자재한가. 여래는 한 마음이 편안히 머물러 동하지 않지만 변화하여 나타내는 한량없는 종류들로 하여금 제각기 마음이 있게 하며, 여래는 어떤 때에 한 가지 일을 짓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각각 마련하게 하며, 여래의 몸은 언제나 한 세계에 있지만, 다른 세계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 하느니라. 다섯째는 근(根)이 자재한 까닭이니, 어떤 것을 근이 자재하다 하는가. 여래는 하나의 근으로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임을 지각하고 법진(法塵)을 알기도 하거니와, 여래의 여섯 가지 근은 보지도 않고, 듣지도 맡지도 맛보지도 닿임을 지각하지도 법진을 알지 아니하기도 하느니라. 이렇게 자재하는 까닭으로 근으로 하여금 자재케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 하느니라.
  여섯째는 자재한 까닭으로 온갖 법을 얻거니와, 여래의 마음에는 얻었다는 생각이 없나니, 왜냐 하면 얻은 바가 없는 연고니라. 만일 있는 것이라면 얻었다 이름하려니와 실제로 있는 바와 없는데, 무엇을 얻었다 하겠는가. 만일 여래께서 얻었다는 생각이 있다면, 부처님들이 열반을 얻는다 할 수가 없지만, 얻음이 없으므로 열반을 얻었다 하느니라. 자재함으로써 온갖 법을 얻고, 모든 법을 얻었으므로 큰 나라 이름하느니라. 일곱째는 말씀이 자재하므로, 여래가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할 때에 한량없는 겁을 지내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나니, 계행이거나 선정이거나 보시거나 지혜 따위니라. 그러나 여래는 조금도 내가 연설하고 저가 듣는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한 게송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네 글귀를 한 게송이라 하므로, 세상을 따라서 게송이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할 곳이 없지만, 자재함으로써 여래가 연설하는 것이며, 연설하므로 큰 나라 하느니라. 여덟째는 여래가 모든 곳에 두루함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허공의 성품을 볼  
   
 
[516 / 909] 쪽  
  수 없는 것처럼 여래도 볼 수 없건만, 자재함으로써 모든 이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니, 이렇게 자재한 것을 큰 나라 하는 것이요, 이렇게 큰 나를 대열반이라 이름하며, 이런 이치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마치 보배 광에 신기한 보배가 많으며, 온갖 것이 구족한 것을 큰 광이라 하나니, 부처님의 깊은 법장도 그와 같아서 여러 가지 기특한 것을 구족하여 모자람이 없으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끝이 없는 물건을 크다 하나니, 열반이 끝이 없으므로 대라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크게 즐거움이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하나니, 열반은 즐거움이 없건만 네 가지가 즐거우므로 대열반이라 하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낙이 끊어진 까닭이니, 낙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괴롭다 이름하며, 괴롬이 있으면 큰 즐거움이라 이름하지 못하거니와, 즐거움이 없어졌으므로 괴롬이 없으며, 괴롬도 없고 즐거움도 없음을 큰 즐거움이라 하느니라. 열반의 성품은 괴롬도 없고 즐거움도 없나니, 그러므로 열반을 크게 즐거움이라 하는 것이며, 이런 뜻으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낙에 두 가지가 있으니, 범부의 낙과 부처님의 낙이니라. 범부의 낙은 무상하여 파괴되나니, 그러므로 낙이 없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즐거워 변동이 없으므로 크게 즐겁다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세 가지 받아들임[受]이 있으니, 괴로움[苦受]과 즐거움[樂受]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不苦不樂受]이니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괴로움이라 하건댄 열반은 비록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과 같지만, 그래도 크게 즐거움이라 하며, 크게 즐거우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둘째는 크게 고요하므로[大寂靜] 크게 즐겁다 이름하나니, 열반의 성품은 크게 고요하니라. 왜냐 하면 온갖 시끄러움을 멀리 여읜 까닭에 크게 고요하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셋째는 온갖 것을 아는 까닭으로 크게 즐겁다 하나니, 온갖 것을 아는 것이 아니면 크게 즐겁다 이름하지 못하거니와, 부처님께서는 온갖 것을 아시므로 크게 즐겁다 하고, 크게 즐거우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넷째는 몸이 무너지지 아니함을 크게 즐겁다 하나니, 몸이 무너진다면 즐겁다 할 수 없거니와, 여래의 몸은 금강과 같아서 무너지지 아니하며, 번뇌의 몸이 아니고 무상한 몸이 아니므로 크게 즐겁다 하며, 크게 즐
   
 
[517 / 909] 쪽  
  거우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세간의 이름은 인연이 있기도 하고 인연이 없기도 하니라. 인연이 있다는 것은 저 사리불은 어머니의 이름이 사리니, 어머니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으므로 사리불이라 하느니라. 마투라(摩鍮羅) 도인은 마투라국에 났으니 나라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으므로 마투라 도인이라 하느니라. 목건련 존자는 목건련이 성이니, 성으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으므로 목건련이라 하느니라. 나는 구담(瞿曇)의 문중에 났으니, 성으로 인하여 이름하였으므로 구담이라 하느니라. 비사가(毗舍佉) 도인은 비사가는 별 이름이니, 별로 인하여 이름하였으므로 비사가라 하느니라. 육손이라 함은 손가락이 여섯이므로 육손이라 이름하며, 불노(佛奴)·천노(天奴)라 함은 부처님을 인하고 하늘을 인하였으므로 불노·천노라 하며, 습기를 인하여 났으므로 습생이라 하며, 소리로 인하여서 가가라(迦迦羅)·구구라(究究羅)·달달라(呾呾羅)라 이름하였으니, 이런 이름들은 인연이 있는 것이니라.
  인연이 없는 이름은 연화·땅·물·불·바람·허공 따위니라. 저 만다파(曼陀婆)는 한 이름에 두 가지 실물이 있으니, 전당(殿堂)과 물을 마심이라, 전당도 아니고 물을 마시지도 않았지만, 만다파라 이름지었고, 살바차다(薩婆車多)는 사개(蛇蓋)라 하거니와, 실로는 사개가 아니니 이런 것은 인연이 없이 억지로 이름지은 것이니라. 지라바이(坻羅婆夷)는 기름을 먹는다는 것이니, 실제로 기름을 먹지 않았지만, 억지로 이름을 지어 기름먹이라 하였으니, 이런 이름들은 인연이 없이 억지로 지은 이름들이니라. 선남자여, 대열반도 그와 같아서, 인연이 없는 것을 억지로 이름한 것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허공을 작은 허공을 인하여 큰 허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열반도 그러하여 작은 것을 인한 것이 아니지만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법을 칭량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을 크다고 하는 것처럼, 열반도 그러하여 칭량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므로 대반열반이라 이름하였느니라. 순전하게 깨끗하므로 대열반이라 하나니, 어떤 것을 순전하게 깨끗하다 하는가. 깨끗함에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나는, 25유는 부정하다 하고 능히 끊은 것을 깨끗하다 하며, 깨끗한 것을 열반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열반을 유(有)라고도 하나니, 열반은 유
   
 
[518 / 909] 쪽  
  가 아니지만, 부처님이 세속을 따라서 열반을 유라고 말하였느니라. 마치 세상 사람이 아비가 아닌 이를 아비라 하고 어미가 아닌 이를 어미라 말하여, 실로는 부모가 아니지만 부모라 말하는 것이니, 열반도 그와 같아서 세속을 따르므로 부처님에게 대열반이 있다고 말하느니라.
  둘은, 업이 청정한 까닭이니, 모든 범부는 업이 청정하지 못하므로 열반이 없거니와, 부처님들은 업이 청정하므로 크게 깨끗하다 하고, 크게 깨끗하므로 대열반이라 이름하느니라. 셋은 몸이 청정한 까닭이니, 몸이 무상하면 부정하다 하거니와, 여래의 몸은 항상하므로 크게 깨끗하다 하고, 크게 깨끗하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넷은 마음이 청정한 까닭이니, 마음에 누(漏)가 있으면 부정하다 하거니와, 부처님 마음은 누가 없으므로 크게 깨끗하다 하고, 크게 깨끗하므로 대열반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선남자 선여인이 이렇게 대반열반경을 수행하여 첫째 공덕을 성취하여 구족하였다 하느니라."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