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책진 (禪關策進)
서문(序文)
도(道)에는 내외(內外)가 없으며 출입이 없는 것이어늘, 선(禪)에서 어찌 관문 (關門)이 있으랴. 그러나 도를 닦음에 사람에는 미(迷)와 오(悟)가 있으므로, 이에 큰 선지식인 관문지기가 있어서 시기에 맞춰 관문 2) 을 열고 닫으며, 자물쇠를 잘 단속하며, 사실을 엄히 감정함으로써 말과 복색을 달리하여 슬며시 법도를 뛰어넘어 가려는 자로 하여금 부득이 그 간사를 부리지 못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관문을 지나기가 쉽지 아니한지도 이미 오래다.
내가 처음 출가하였을 때 마을에서 한질 책을 얻었었는데 이름을 「선문불 조강목(禪門佛祖綱目)」이라 하였다. 거기에는 옛 여러 큰스님께서 처음 공부 지어가기 어려웠던 일이며 중간에 노고하신 경력이며 마침내 신오(神悟)를 얻으신 일 등이 실려있어, 내 이를 크게 아끼고 중히 여겨 깊이 배우기를 간절히 바랐더니, 이윽고 이 책은 다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어 오등(五燈) 3) 제 어록과 여러 스님들의 전기를 열람하면서 치소(緇素) 4) 를 막론하고 다만 실지 참구하고 실답게 깨친 대문은 모두 모으고, 다시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고 요긴한 것만을 간추려서 한편을 만들어 이름을 바꾸어 「선관책진」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집에 있을 때는 책상머리에 두고 행각할 때는 걸망에 넣어서 항상 지니고 다녔던 것인데, 한번 책장을 펴면 즉시에 심지(心志)가 격발하고 정신이 새로와져 불각 중 스스로 깨우치고 채찍질 되어 앞으로 내닫는 것이었다.
혹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이는 아직 관문을 지나지 못한 이를 위함이요, 이미 관문을 지난 이는 벌써 멀리 갔거니 이를 어디에 쓰랴" 할 것이다. 그러나 관외에는 거듭 관이 있는 것이니, 저 거짓 닭소리를 빌어서 잠시 호랑이의 환을 면하며 5) 적은 것을 얻고 족히 여기는 것은 이미 증상만인(增上慢人) 6) 이 됨이니, 아직 물이 다하지 아니하고 산이 다하지 않았는데, 채찍이 손에 있으면 빠르고, 다시 멀리 달려 마침내 최후의 깊은 관문을 뚫을 것이니 그 때에 서서히 파참재(罷參齋) 7) 를 베풀어도 늦지 않느니라.
- 만력(萬曆) 8) 28년 경자년 이른 봄, 운서 주굉 적음 -
▒ 용어정리 ▒
[1] 선관책진(禪關策進) :
참선공부를 지어가매 꼭 지나가야 할 관문으로 일깨우고 채찍질하여 나아간다는 말이니, 깨우치지 못하는 것을 일깨고 나아가지 않는 것을 채찍함이다. 꼭 지나가야 할 관문이란 바로 조사관이다.
[2] 관문.조사관(關門.祖師關) :
옛날에 국방상 혹은 경제상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 관문인데,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데는 반드시 화두를 꼭 통과하여야 하므로 화두가 조사가 되니 관문인 것이니, 그래서 공안을 '조사관' 이라 하는 것이다.
무문개(無門開)선사가 말씀 하시기를,
"참선은 반드시 조사관을 뚫어야 하고 묘오(妙悟)는 반드시 마음길이 끊어져야 한다. 조사관을 뚫지 못하고 마음길이 끊기지 않았으면 이것은 다 초목에 붙은 허깨비 종류니라." 라고 하였다.
[3] 오등(五燈) :
등이 차례차례 불 붙어져 꺼지지 않는 것처럼, 법을 받고 전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을 '전등' 이라 하고, 전법 수법하는 의식을 '전등식' 이라 한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의 행적과 사법의 경위와 순서를 기록한 글에 "등"자를 붙여왔으니 전등(傳燈), 속등(續燈), 광등(廣燈) 보등(普燈), 연등(聯燈)이 그것이다.
[4] 치소(緇素) :
출가인과 재가인. 승속이라는 말.
[5] 거짓 닭소리 :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은 누군가 한가지 재주가 있으면 신분을 따지지 않고 후대했다. 그 명성이 높아 진나라왕에게 초청되었다가 목숨이 위급하게 되었는데 마침 3천명의 식객 중에는 도적질을 잘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도움으로 풀려나 급히 도망치다가 밤중에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닭이 울어야 문을 열므로 못 나가고 있었더니 또 다시 식객 중에는 닭 흉내를 잘 내는 자가 있어 닭 울음소리를 내니 모든 닭들이 일제히 따라 우는지라, 관문지기가 시간이 된 줄 알고 문을 열음에 맹상군은 문밖으로 달아나 위기를 피하였다.
[6] 증상만인(增上慢人) :
소견소법(小見小法), 즉 소승에 만족하고 다른 법 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리.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여 자시하는 무리. 법견에 국집하는 무리. 법화회상(法華會上) 벽두에 퇴석한 5천인이 보인다.
[7] 파참재(罷參齎) :
공부를 마치고 조사의 인가(印加)를 받을 때 베푸는 재연.
[8] 만력(萬曆) :
명(明) 제13대 신종(神宗)때의 역호. 28년은 우리나라 이조 15대 선조 33년이니(서기 1600년) 임진왜란이 지난 2년 후가 된다.